‘3년간 30억’…30년 노조 KEC지회에 지워진 빚의 무게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공이지만 손배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박다솔 기자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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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딸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용돈이 필요 없대요. 공부 욕심 없는 애도 아닌데 일찍 철든 딸한테 너무 미안해요.”
중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을 둔 한정희(45) 씨는 경북 구미시의 반도체공장 KEC에 1994년 입사했다. KEC에서 품질 보증(QA)을 담당하던 한 씨는 2010년부터 시작된 사측의 구조조정에 맞서 지금껏 싸워왔다. 조합원 700여 명이 반의 반 토막으로 줄 때까지 버틴 한 사람이다. 사측의 악랄함은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밤중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여자 기숙사를 침탈해 불법 감금하고 동원된 용역은 욕설과 성희롱을 저질렀다. 파업 철회 후 회사로 복귀한 뒤에는 파업 참여 정도에 따라 옷 색깔을 다르게 입히는 현대판 홀로코스트가 재연됐다. 노동자가 학생도 아닌데 명심보감을 외우게 하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그래도 KEC지회는 구미, 경북, 서울 등 전국의 투쟁 사업장에 결합해 건강한 민주노조임을 증명해왔다.
조합원을 좌절시킨 그 날은 지난해 9월 20일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지회는 사측에게 3년 동안 30억 원을 갚으라는 법원의 화해 조정에 동의했다. 지난 2011년, 사측이 불법 공장 점거를 이유로 제기한 301억 원 손해배상은 그렇게 종결됐다. 그나마도 1심이 진행된 6년 동안, 사측이 스스로 손해배상 청구 이유와 금액산정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청구액이 156억 원까지 감액됐다. 그 후 70억 원으로 감액되려던 차에, 법원의 화해 조정으로 3년간 30억 원을 갚기로 합의했다.
“‘설마 (배상하라는 판결이) 떨어지겠나’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30억 갚으란 얘기를 들으니까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지회 설명회에서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차 안으로 돌아오니까 눈물이 나대요. 우리 5년 싸웠는데 손배로 끝이 나나 싶고, 가족들 생각나면서 눈물밖에 안 나더라고요. 신랑한테 전화하니까 한숨을 푹 쉬면서 집으로 오래요. 집에 가니까 ‘좀 더 허리띠 졸라매면 된다’고 해요. 내가 공장 점거할 때도, 8일씩 9일씩 서울로 투쟁 나갈 때도 많이 도와주던 사람이거든요”
30년 노조는 우리의 피, 땀, 눈물
▲ KEC지회 조합원의 지난 10월 급여명세서. 사측의 가압류 금액을 제한 월급은 147만 원 정도다. [출처: 금속노조 경북구미지부 KEC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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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월급날부터 조합원 62명은 최저생계비 150만 원을 받는다. 실수령액이 300만 원이 넘는 조합원들은 50% 압류로 15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쥘 수 있다. 화해 조정이 있기 전, 사측은 퇴직하면 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를 해주기도 했다. 그때 20명 넘는 조합원이 떠났다. 하지만 화해 조정 이후 퇴직 종용은 노조탄압으로 처리돼 더는 그런 일은 없다. 62명은 퇴직을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지게 돼 있다. 하지만 10월부터 조합원 2명이 회사를 떠났다. 문제는 떠난 사람만큼 남은 사람이 갚아야 할 몫이 커진다는 점.
“한 명씩 나가면 남아있는 사람들한테 좀 더 돌아가게 되는 시스템이에요. 3년 안에 못 갚으면 이후가 걱정이죠. 사람인지라 같이 싸울 땐 서로 동지였지만 떨어져 나가면 잘했던 기억은 하나도 안 나고 섭한 기억밖에 안 남을까 봐요.”
3년 안에 30억을 갚지 못한다면 노조는 나간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걱정이 크다. 같이 싸운 동료들을 두고 회사를 나오는 일, 나간 동지에게 끝까지 책임을 묻는 일 모두 정신적으로 크게 괴로운 일이다.
KEC지회가 설립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지회는 정규직으로 이뤄진, 노동 3권을 사수했던 건강하고 활기찬 노조였다. 2010년 임단협을 요구하자 직장폐쇄로 맞불 놓은 사측. 2012년부터는 노후산업단지를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바꾸는 사업인 공단구조고도화 등을 진행하며 인원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정리해고 시도는 계속 이어졌고, 노조는 파업으로 구조조정을 막았다. 30억 외에도, 사측은 업무방해 등을 들어 부르는 게 값이라는 듯 간부들을 향해 5억(1심 5천만원 위자료 판결, 항소 중), 3천 8백만원(1심 850만원 판결, 항소 포기)의 손배를 청구했다. 2012년 정리해고 과정 중 생긴 노사 마찰로 김성훈 지회장은 8개월 구속됐다.
조합원을 겨냥한 150억 소송의 화해 조정을 받아들었던 일을 두고 왜 노조답게 싸우지 않았냐 비판의 목소리도 거세다. 조합은 스스로 ‘고립’됐다고 말했다. 김성훈 지회장은 화해를 선택했던 이유에 대해 힘들게 말을 꺼냈다. “당사자인 저희와 듣는 입장인 다른 분들은 손배 건에 대한 몰입이 다를 거예요. 70억 집행하게끔 싸우는 게 나은지, 의지있는 재판관이 만든 화해로 30억을 무는 게 나은지 선택을 해야 했어요. 민주노조 열망이 있는 조합원들입니다. 안된다고 하는 싸움하면서 이기기도 했고요. 스스로 선택하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책임도 우리가 질 겁니다.”
이들과 연대하는 윤지선 손잡고(손배가압류를잡자!손에손을잡고) 활동가도 지회의 특성상 그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설명한다. “여성이 절반인 사업장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는 임금 수준이 낮아 손배 가압류 압박이 더욱 심하죠. 실질적 가장이 아닌 여성들에게는 주변의 압박도 집중되고요. 노조 입장에선 노조를 깨지 않기 위해 더 적은 돈을 다 같이 나눠진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헌법 비웃는 손배
손해배상. 돈으로 노동 3권을 옥죄는 자본과 국가의 수법은 꾸준히, 오랫동안 노동자를 벼랑으로 몰았다. 손배 소송을 당한 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2012년 한진중공업의 최강서 열사가 그랬고,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가 분신했다.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는 손배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 깨는 방법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손배, 가압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줘요. 단 1심이라도 패소하게 되면 노동자의 재산 권한은 회사가 쥐게 되잖아요. 손배 가압류의 첫 번째 속성은 노조를 깨는 데 있고 두 번째는 인간성을 짓밟죠. 연대책임으로 갚아야 할 때 금액이라는 무게를 이용해서 자꾸 이탈하게 하고, 서로서로 배신하게 해요.”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은 새누리당의 반대로 상임위에서 단 한 차례 논의밖에 거치지 못했다. 노란봉투법은 파업 후 손배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기 위한 법이다. 주요 내용은 ▲합법적 노조 활동범위를 확대 ▲노동자 개인과 가족 신원 보증인에게까지 손배를 청구하지 못하도록 제제 ▲법원 결정에 필요한 손배 기준 제시, 영국의 사례를 참고로 노조 규모에 따른 손해배상 상한액 규정 등이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목적으로 현재 법제도 개선위에서 다듬는 중이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이미 판결이 끝난 곳은 소급적용되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빨리 법안이 통과돼 노동의 그늘이 지워지길 바라고 있다.
원문보기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