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연극 <노란봉투> 관람기
▶ 손잡고는 ‘손배 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의 줄임말이자,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고, 손해배상과 가압류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시민 모임입니다. 올해 2월에 출범한 손잡고는 <한겨레>와 지난 6월부터 4개월간 손배 가압류의 현장을 조명하는 공동기획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지난달 25일엔 연극 <노란봉투>가 서울 대학로에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손잡고가 준비한 첫 문화기획입니다. 연극은 오는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손해배상 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담은 연극 <노란봉투>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지난달 25일 시작돼 3주간 공연된다. 이 연극엔 매번 노동현장에 있는 실제 노동자가 극 말미에 출연한다. 첫 공연인 지난달 25일엔 학습지 교사이자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의 전 재능교육지부장이었던 유명자씨가 무대에 올랐다. 배우가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유씨를 천연덕스럽게 일으켜 세워 극 중 다른 배우들에게 소개했다.
“다들 인사하세요. 이분은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이라고, 거기서 해고된 유명자 지부장입니다. 벌써 7년째 길에서 노숙투쟁을 하고 계신 분이에요. 오늘 우리 노조 사무실에 연대투쟁을 부탁하러 오셨대요. 소개 좀 해주세요.”
유씨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엷게 떨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학습지 교사입니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사람입니다.”
학습지 교사, 레미콘 기사, 택배 배달원, 보험판매원, 골프장 캐디 등은 회사로부터 업무를 지시받고 그 일을 수행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회사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노동자’가 아니다. 이들은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자영업자로 분류된다. 따라서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유씨가 말을 이었다.
“노동의 문제가 나는 겪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구나 머리에 빨간 띠를 맬 수 있고, 고공농성을 할 수 있고, 목을 맬 수 있습니다. 이게 내 일이 되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재능교육 노조는 1999년부터 존재해왔다. 잦은 계약 해지와 실적 압박, 임금 삭감에 시달리던 여성 학습지 교사들은 노조를 통해 자기 권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때 노조원이 3000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2007년 11월 임금체계에 문제가 있으니 단체협약을 개정하자고 요구한 노조에 회사는 해고 협박을 한다. 이듬해 회사는 학습지 교사는 노조를 만들 수 없는 신분이라며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해지했다. 노조원은 10명만이 남았다. 유씨가 7년째 거리에서 농성을 한 이유다. 유씨는 왜 손해배상 가압류가 노동자에게 가혹한지를 설명했다.
“손배 가압류는 유무형의 살인입니다. 같은 조합원들끼리 싸우고, 반목하고, 배신하고, 회사보다 서로를 더 미워하게 하는 잔인한 방식의 살인입니다. 우리는 처음엔 임금 삭감에 반대해 싸웠습니다. 그러다 노조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이유로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습니다. 집에 아이들이 있었는데도 들이닥쳐서 그 앞에서 집에, 가구에 빨간딱지를 붙였습니다. 손배 가압류는 정말 무섭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 요구했던 복직이나 임금인상 같은 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그저 압류만 풀어달라고 얘기하게 됩니다.”
손배 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모임 손잡고의 첫 문화기획
연극 <노란봉투>의 막이 올랐다
매 공연에 실제 노동현장의
노동자가 출연한다
손배 가압류 문제의 핵심은
결국 인간관계의 파괴,
극복 열쇠도 관계 회복에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인식이 노동문제 해결의 단초
“우리 회사엔 높은 굴뚝이 없어요”
유씨의 발언을 듣고, 극 중에서 동료들을 배신하고 회사 쪽에 서서 용역 경비원들과 함께 쇠파이프를 휘둘렀던 강호가 고공농성에 참여한다. 배신한 강호를 마뜩잖아했던 병로는 이때만큼은 고개를 끄덕인다. 병로와 강호가 전광판에 올라가면서 연극은 끝난다. 병로는 전광판에 오르기 전에 말한다.
“우리 회사에는 높은 굴뚝이 없어요. 근처에 송전탑도 없고, 성당의 종탑도 없어요. 하지만 다행히 전광판이 있어서 거기라도 올라갑니다.”
마치 한진중공업의 김주익과 김진숙씨가 크레인에 오르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가 공장 근처 송전탑에 오르고, 쌍용차의 한상균·문기주·복기성씨가 고압송전탑에 오르고, 유성기업의 홍종인·이정훈씨가 광고탑에 오르고, 재능교육의 오수영·여민희씨가 성당 종탑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씨앤앰의 강성덕·임정균씨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전광판에 오른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시대 벼랑에 몰린 노동자들은 높은 곳에 있는 외딴섬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른다.
연극 <노란봉투>는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모임 ‘손잡고’가 마련한 첫 문화기획이다. 지난해 11월 수원지방법원이 파업을 진행한 쌍용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회사 쪽에 47억원을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하고서, 거의 정확히 1년 뒤 연극이 시작됐다. 그사이 여러 일들이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 배춘환씨가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편지와 함께 노란봉투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해고 노동자에게 47여억원을 손해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내년에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47억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려 봤더니 4만7000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법원에 일시불로 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선 이 돈 4만7000원부터 내주실 수 있나요”라고 쓰여 있었다. 이 편지는 예상치 못한 바람을 일으켜 모금 캠페인으로 이어졌고, 이효리와 노엄 촘스키 등 유명인은 물론 4만7547명이 참여해 총 14억7000여만원을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월급봉투이자 해고통지서로 비치던 ‘노란봉투’가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노란봉투 캠페인은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돈을 대신 갚는 캠페인을 넘어서 손배 가압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시민모임 ‘손잡고’가 올해 2월 출범했다. 이번 연극은 손잡고의 운영위원장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올봄에 ‘연극동인 혜화동1번지’에 제안해 이뤄졌다. 집필을 맡은 이양구 작가는 직접 노동현장을 다녔고, 연출가들과 배우들은 함께 관련 책을 읽고 강사를 초빙해 세미나를 열었다. 조국 서울대 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 등이 강사로 나섰다. 한마디로 연극은 탄탄한 현장 취재와 현실 이해 위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극장 문을 통과하면서 관객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는 책자에 이양구 작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이렇게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시대에 연극과 극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대답 또한 분명한 것이어서 연극과 극장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만남의 공간’이기를 원했다. 이것은 그리스 시대 이래 극장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인 시민의 정치적 광장으로서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야”
메시지가 강한 연극이나 영화가 쉽게 범하는 우가 있다. 바로 해석의 여지가 좁다는 것이다. 빡빡하게 들어찬 메시지로 구성된 이야기가 만일 형식미마저 갖추지 못한다면, 관객은 지루하다 못해 질려버릴 수도 있다. 연극 <노란봉투>는 어떨까.
판단은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등장인물의 대사가, 이야기가 보여주는 상황이 자꾸 무언가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이다. 연극은 자동차 부품 회사인 에스엠(SM)의 노동조합 사무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극 중 인물인 노조원 병로와 지호는 노조 사무실에서 뉴스에 출연할 상황에 대비해 연습을 하는 중이다. 그러다가 둘은 약간 엉뚱한 주제로 논쟁한다. 병로가 “생방송인데, 생방송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듣고 있던 지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생방송이면 생방송이고 아니면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병로는 답답하다는 듯이 재차 설명한다. “생방송이야. 근데 생방송이 아니야.” 공교롭게도 연극 말미에 깜짝 출연한 유명자씨는 자신을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소개한다. 비록 내용은 다르지만 묘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수미상응식 구성이다. 연극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그 대상은 극장 바깥의 사회이기도 하지만 극 안의 인물과 대사이기도 하다.
둘이 대화하던 중에 또 다른 노조원 아진이 등장한다. 뉴스를 연습하는 둘을 보고 아진이 말한다. “뉴스에서 우리 얘길 내보내준대?” 지호가 답한다. “안 내보내주니까 우리가 지금 하고 있잖아. 굴뚝 같은 데 올라가서 2000일 정도 있거나 거리에서 5년은 죽치고 살아야 조금 관심 갖겠지. 어쨌든 언제 우리도 뉴스에 나올지 모르니까 준비해둬야지.” 병로와 지호는 뉴스를 연기하며 생방송 논쟁을 이어간다. 병로는 방송기자가 중계차 연결하기 1~2분 전에 미리 녹화하는 장면을 봤다고 말한다. ‘생방송인데, 생방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 이야기는 시간의 상대성 논쟁으로 이어지다. 아진은 “어차피 소리가 달려가는 시간, 전파가 달려가는 시간의 차이도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간격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1~2분이나 1~2초나. 내 말은, 간격은 결국 느끼는 사람의 문제라는 거야. 사건도 마찬가지야. 똑같은 일도 당사자는 깊게 겪으니까 평생이 지나가도 현재형인 거고, 당사자가 아니면 금방 잊어버리는 거지.”
그러면서 연극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인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극 중에서 노조 동료들을 배신하고 회사 쪽에 서서 용역들과 함께 쇠파이프를 휘두른 ‘민성이 형’의 아들 민우가 세월호에 탄 것이다. 3년 전 노조 간부로서 파업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10억원의 가압류가 걸려 아빠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다던 민성이 형은 결국 ‘손배를 풀어주고 복직시켜준다’는 회사의 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고선 다른 노조원들의 회유에 나섰고, 파업을 진압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런 민성이 형의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노조원들은 내심 걱정하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뉴스가 떴다. “전원 구조됐대!” 무대 위 배우들은 모두 환호한다. 하지만 관객석에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극을 보고 “어른이 되고 싶다”던 여고생
대사는 치밀하게 구성됐다. 극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으나, 다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동료들에게 다가가는 ‘강호’란 인물이다. 강호는 동료들에게 계속 욕을 먹으면서도 노조 사무실을 찾는다. 강호가 민성이 형을 변호하며 “그동안 민우 하나 키우는 꿈으로 일했고, 민우한테 힐리스 운동화 하나라도 사주고 싶어서 3년 동안 싸운 거 접고, 동지들 배신해가며 온갖 굴욕적인 요구를 다 수용했던 건데”라고 말한다. ‘힐리스 운동화’는 2003년 11월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목을 맨 김주익 전 노조위원장의 유서에 나온 내용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 약속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유서에 적었다. 또 병로가 죽은 민성이 형을 원망하며 “나한테 사랑이 뭔지, ‘인간의 꿈’이 뭔지 가르쳐 놓고 저가 먼저 부서졌다”고 말한다. ‘인간의 꿈’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손배 가압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처음 의제화했던 배달호씨의 평전 제목이다. 지호가 “원청인 내가 만드는 벨로즈(자동차 부품)나, 하청인 너가 만드는 벨로즈나 똑같다”는 대사는 자동차 바퀴의 왼쪽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은 하청업체 파견근로자가 다는 현대자동차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극 중에서 여러번 소개되는 자동차 부품 벨로즈는 실제 용역업체의 폭력으로 파문이 일었던 에스제이엠(SJM)이 생산하는 물건이다. 이양구 작가는 ‘벨로즈’라는 부품의 위상이 우리 사회에 노동자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벨로즈는 엔진과 배기통 사이에서 압력과 열을 받는 완충장치 역할을 해주거든요. 자기 몸이 변형되면서도 그 열과 압력이 양쪽에 전달되지 않도록 하면서 엔진과 배기통 양쪽을 보호하는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 사회의 노동자가 딱 벨로즈예요. 자본과 사회,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노동자와 비슷해요. 그 사이에서 버티며 몸이 망가지는데도,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알아보지 못하죠. 우리가 자동차의 엔진과 배기통은 알지만, 벨로즈는 모르는 것처럼요.”
연극이 끝나고, 관객석에 불이 켜졌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휘봉고 2학년생인 김보경(17) 학생에게 연극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대답은 다소 엉뚱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왜요?”
“어른이 돼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학생이 어른이 되어도 세상은 쉽게 안 바뀔 수 있어요.”
“그래도 지금보다 더 도울 수 있잖아요.”
이 말을 하고서 학생은 잠시 동안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연극은 열린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다. 극 중에서 당장 보도할 권한은 없지만, 나중에 다큐리멘터리 영화로 만들어 노동자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방송사 피디에게 병로가 “그쪽은 왜 자꾸 여길 와요? 다큐멘터리가 돈 되는 일도 아닌데”라고 말한다. 이에 피디는 “자본가들은 돈이 된다면 간단하게 뭉치잖아요. 우리는 무엇으로 뭉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 연극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의 정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