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시사인] 41년을 일하고 수십억 빚이 쌓인 사람 (손잡고 윤지선 활동가)

41년을 일하고 수십억 빚이 쌓인 사람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

원문보기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32

 

ⓒ윤현지 그림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07)에서 김진숙은 한진중공업에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자 단결과 승리가 이 통찰에서 나왔다고 적었다. 경영진이 경영을 제대로 못하고 무책임하게 떨어져 나간 자리, 이 일터를 단단히 지킨 건 배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한진중공업에서 정년을 맞이한 노동자 차해도씨를 만난 적이 있다. 18세에 배를 만들기 시작한 차해도는 이후 41년10개월을 일했다. 그를 만난 이유가 온전히 정년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축하는 잠깐이었다. 정년이 되어도 그에게 착 붙어 있는 지긋지긋한 손해배상(손배)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차해도가 당사자 중 한 명인 손배는 두 건이다. 하나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당시 쌍용차 노동자들과 연대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청구한 국가 손배 24억원, 다른 하나는 2012년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의 유서에 새겨진 회사의 청구액 158억원이다. 국가 손배는 11년째 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고, 노동자 최강서의 죽음으로도 막지 못한 회사의 손배는 이듬해인 2013년 1심에서 59억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41년10개월을 일하고 내 앞으로 빚이 얼마야.” 그는 소주 한잔을 넘기며, 쓰게 웃었다.

그래도 정년을 맞았다.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정년을 마치는 일이 그 자체로 ‘투쟁’인 현실이다. 그는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가 일터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배는 ‘이지스함’이다. 이지스함을 시운전하는 날, 함께 배를 만든 동료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이 그가 일터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배를 만들었다. 배의 품질이 곧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경영은 매번 어렵다고 했다. 오너리스크는 오너가 떠나고 나면 온전히 노동자 몫이 됐다. 차해도가 처음 몸담았던 마산 코리아타코마는 2003년 영도로 옮겨왔다. 마산, 울산, 부산에 각기 있던 공장이 한진이라는 대기업 자본에 의해 하나가 되며 규모가 축소되었고, 묵묵히 배를 만들던 노동자들의 목을 옥죄었다.

당시 마산지회장이던 차해도는 영도 한진중공업 김주익을 만났고, 함께 투쟁하던 그를 떠나보냈다. 노조 간부 활동만 30년, 그동안 막아내고자 한 정리해고가 무려 네 번이다. 정작 그는 정리해고 대상자는 아니었다.

차해도와 변호인 문재인의 만남

차해도가 41년10개월 일하는 동안 딱 한 번 해고될 위기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징계해고를 당했고 그는 소송에서 이겼다. 복직도 했다. 해고무효 소송의 2심 변호인은 노무현, 3심 변호인은 문재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낙선한 문재인 후보는 칩거 후 첫 행보로 최강서의 주검 앞에 섰다. 당시 지회장이던 차해도는 자신의 변호인이던 정치인 문재인과 마주했고, ‘책임을 느낀다’는 그의 회한에 젖은 얼굴을 보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3년을 넘긴 지금, 한진중공업은 다시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 한진은 이번에도 손해를 최소화하며 발 뺄 궁리를 할 테다. 또 묵묵히 배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삶만 불안정하다. 경영상 위기에 맞선 노동자의 권리행사는 무력하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사법부가 ‘판결’로 무력하게 만들었고, 이에 더해 ‘손배’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경영상 위기를 노동자가 초래한 적이 있던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망하지 않으려는 부자의 발악에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노동자들의 삶만 송두리째 치이는 것을 법과 사회가 허용하고 있다. 이게 당연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