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2 문화저널21] [인터뷰]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입니다” ②

[인터뷰]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입니다" ②

쌍용차 노동자들의 시간여행

성상영 기자

원문보기 http://www.mhj21.com/127032

 

누군가는 소박한 꿈을 안고, 또 누군가는 그저 자동차가 좋아서 들어왔다. ‘무쏘’와 ‘체어맨’, ‘이스타나’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차들이 내 손을 거쳐 갔다. 매일 밤낮으로 잔업과 특근을 하며 자재를 나르고 볼트를 죄었다. 회사가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했지만, 나는 묵묵히 삶의 터전을 지켜왔다.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다.

 

지난 7일 불러주는 이 없었던 출근길에 오른 지 보름여. 쌍용차 노동자들과 짧게나마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가슴 설레던 첫 출근의 순간부터 아마도 ‘라인을 타고 있을’ 가까운 미래까지 주마등을 켰다. 2009년만큼은 잠시 건너뛰고 싶었다.

▲ (왼쪽부터)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상민·박승순 씨가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 서 있다.  © 성상영 기자

현재: 10년 7개월 만에 나는 돌아왔다

 

지난 7일 유급휴직 전환과 함께 부서 배치가 무기한 연기된 쌍용차 노동자 46명이 출근했다. 회사가 불러서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2009년을 뒤로 하고 단숨에 지금으로 돌아왔다. 10년 7개월 만에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 복잡한 감회가 궁금했다.

 

“10년 동안 공장 쪽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회사를 보면 옛날 기억이 너무 많이 나서. 정신과 치료도 받았는데 우울한 면도 있었고, 여럿이 들어가서 좀 덜하긴 했어요. 회사는 인정하지 않지만, 며칠 다니고 나서 ‘회사에 들어왔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2009년에) 이 앞에서 격렬히 싸웠어요. 구속돼서 7개월 정도 있다가 나왔는데 회사가 나를 버린 느낌. 그래도 동료들이랑 왔다 갔다 하니까 안도하는 게 있어요.” (박승순 씨)

 

“비슷해요. 저 같은 경우는 (해고 이후) 하도급 업체에서 일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은데, 지금 와서는 복직하게 됐잖아요. 처음보다 심적으로 안정이 되기는 했는데 아직 부서 배치를 못 받고 있으니까 착잡하죠.” (조문경 씨)

 

“2015년부터 기대를 하면서 참아왔는데 ‘차차’(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실의 별칭)에서 회사 정문을 바라보면 되게 원망스러운 거예요. 노·노·사·정 합의 이후에는 정문을 바라보는 게 달라졌어요.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예전의 느낌이 오는데 24일에 무기한 부서 배치 연기 소식을 들었잖아요. 갑자기 예전에 안 좋았던, 원망스러움으로 바뀌는 거예요. 지금도 라인을 바라보면서 ‘들어오긴 했어’ 하면서 벅차다가 다시 우울해져요. 그게 반복돼요.” (김상민 씨)

▲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가 지난 21일 마지막 남은 노동자 46명의 조속한 부서 배치를 촉구하며 개최한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 앞 집중문화제 현장에 화목난로가 타고 있다. 그 뒤로 ‘관심’과 ‘46명’이라고 적힌 글귀가 보인다.  © 성상영 기자

미래: 다시 ‘라인’에 섰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곧 오게 될 그때. 가까운 미래에 46명은 부서를 배치받고 일하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크게는 쌍용차 해고 사태 11년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점에서, 작게는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낸 노동자들의 치유를 위해서 부서 배치 약속은 ‘무기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20년 설 연휴가 끝난 어느 날 쌍용차 노동자들은 다시 ‘라인’에 섰다.

 

“젊은 사람들의 취향이나 선호하는 옵션을 제품에 반영하고 싶어요. 공장에서는 ‘제안’이라고 해요. 제가 제안을 써서 제출하고 채택되면 돈이 조금 나와요. 라인을 탄다면 뭔가 유심히 보려고요. 밖에서 이 일 저 일 다 해보면서 생각한 게 많으니까 그걸 접목해서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차가 더 잘 팔리게끔 해보고 싶습니다.” (김상민 씨)

 

“제일 먼저 어머니께 다니는 일을 그만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여든이 다 되셨는데 워낙 생활이 팍팍하니까 어머니도 많은 나이에도 치매 환자 간병을 나가세요.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고 돌아오실 때까지 모시고 잘 살겠다고 얘기 드리고 싶어요.” (박승순 씨)

 

상민 씨는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승순 씨는 어머니께 해드리고 싶은 일을 말했다. 정년을 2년 남긴 문경 씨의 대답은 또 달랐다.

 

“언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못 했던 노후 계획을 세우고 싶어요. 작게나마 할 수 있는 걸 빨리 찾아야죠.” (조문경 씨)

 

라인에 다시 선다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 짧게는 19년 만에, 길게는 26년 만에 첫 월급을 다시 받을 것이다. 승순 씨는 역시 노모를 위해 쓰겠다고 했다. 문경 씨는 늦었지만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상민 씨는 자녀들을 위해 첫 월급을 쓰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하루 벌이 살이를 했어요. 우선은 생활비 때문에 돈을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년까지 14년 일할 수 있어요. 첫애를 파업 때 출산해서 쓸 돈도 점점 늘어날 거고…. 정을 못 줘서 너무 미안해요. 첫 월급 받으면 외식을 하고 가족들이랑 정동진에 가려고 합니다.” (김상민 씨)

▲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가 지난 21일 개최한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 앞 집중문화제 현장에서 저녁식사로 순대국이 배식되고 있다.  © 성상영 기자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다”

 

시간여행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서는 오후 7시부터 있을 ‘쌍용차 사회적 합의 파기 규탄 조속한 부서 배치 집중문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실상 설 연휴 전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모아 회사에 전달할 때다. 승순 씨도, 문경 씨도, 상민 씨도 제각기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여기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어요. 해고자로 낙인찍혀서, 또 굳이 복직자라면서 7개월 동안 무급으로 쉬었다가 부서 배치가 무기한 연기되고…. 쌍용차 가족이라고 한다면 지켜지는 약속이 한두 번은 있어야지 않나. 제가 복귀를 해서 다닌다면 그런 일이 없는, 약속을 잘 지키는 쌍용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승순 씨)

 

“(회사에서) 나와서 이렇게 생활할지 몰랐어요. 너무 힘들게 살았어요. 회사에 바라는 게 있다면 저희를 그만 좀 괴롭혔으면 좋겠어요. 회사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저희 사정 알 거예요. 저희를 10년 7개월 동안 너무 괴롭힌 것 같아요. 일 잘할 자신 있어요. 잘할 테니까 일 좀 하게 해주시고, 일 좀 하게 해달라고.” (김상민 씨)

 

조문경 씨는 소비자들이 쌍용차를 선택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만한 가격표를 쌍용차가 내놔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안타까움과 약간의 격정과 회사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진정한 고객은 직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차가 20년이 돼서 쌍용차를 새로 사려고 견적을 빼봤어요. 광고는 해놓고 안 된다는 게 왜 그리 많은지. 한 고객이 코란도 사러 갔다가 티볼리를 샀다는 거예요. 차가 광고하고 너무 안 맞아서. 그 고객이 안 샀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쌍용차를 팔아야 할 거 아니에요. 비싼 차 사고 싶어도 사양을 많이 낮추잖아요. 그런 단계부터 안 된다고 하면 뭘 살 거예요? 차를 사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야죠.” (조문경 씨)

▲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가 지난 21일 마지막 남은 노동자 46명의 조속한 부서 배치를 촉구하며 개최한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 앞 집중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 성상영 기자

최고 보약은 현장에서 일하는 것

 

부서를 배치받지 못한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장 밖에서 열한 번째 설날을 맞는다.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한결같은 생각으로 정말로 끈질기게 버텼다. 몸이고 마음이고 멀쩡한 곳이 없다. 회사는 11년 전에 해고자와 살아남은 자를 갈랐던 것처럼, 돌아간 자와 남겨진 자로 나눴다. 세상은 잔인했다.

 

“더 이상의 아픔을 얘기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하겠죠. 빚도 있고 이혼도 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다 설명을 안 해드리는 것뿐이지 많아요. 회사가 어렵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어차피 들어가기로 했던 건데 미뤄져서 개탄스럽습니다. 빨리 마무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승순 씨)

 

“정신적 고통을 같이 겪었던 사람 중에 먼저 들어가서 일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우울했던 얼굴이 우리하고 비교가 안 될 만큼 밝아졌어요. ‘심리치료니 정신과 치료니 필요가 없구나, 현장에 돌아가니까 밝아졌구나.’ 얼굴색이 달라요. 2009년 해고 때보다 더 충격을 받았던 이번 일을, 빨리 부서 배치를 받으면 고통을 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해고자라는 글씨, 아픔을 지울 수 있는 것은 하루라도 일하는 게 아닐까. 우리들의 최고 보약은 현장에서 일하는 거죠.” (조문경 씨)

 

문경 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순 씨와 상민 씨가 “그렇지”, “약이지” 하며 긴 숨을 내뱉었다. 이들에게 가장 근원적인 처방, 치유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예전에 운전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스쿠버 강사를 했는데 돈벌이가 안 돼요. 재작년부터 안 나갔는데 킨텍스였나, 스쿠버 관련 전시회가 있었어요. 쌍용차 부스에 티볼리를 내놨더라고요. 원망스러워도 밖에서는 다 마음이 있어요. 부스를 돌고 사진도 찍어 왔습니다. ‘차가 이렇게 잘 나왔구나’ 감탄도 하고 사진을 (스쿠버) 회원들 대화방에 올려주고 했거든요. 회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생각은 다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김상민 씨)

 

문화저널21 성상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