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C 임금압류일지 ④ - 한정희 조합원] 평조합원에게까지 떨어진 임금압류

이 글은 30억 원의 손해배상을 갚기 위해 매달 회사로부터 임금이 압류되고 있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구미지부 KEC지회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압류 기록'입니다. 조합원 가운데 44명의 당사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6년 9월 20일, 법원 조정 명령에 따라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액 301억 원 중 30억 원을 3년 동안 임금에서 갚아야 합니다. 파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된 나라에서, 회사의 노조파괴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노동자가 겪어야 하는 모순된 현실을 기록하고 '노조 할 권리'의 현주소를 알리기 위해 해당 조합원들이 용기 내어 노동자 손배소 당사자의 임금압류 일지를 매달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 공개합니다(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 여성이 가장 먼저 내쳐졌다). - 기자 말

나는 올해로 마흔 다섯 살인 여성노동자다. 요즘같이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기 어려운 시기에, 무려 24년을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숙련된 노동자이기도 하다. 집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큰 딸과,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남편이 경제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하면서부터는 우리 집 가장이 됐다. 

그래서인지 종종 동료들에게 슈퍼우먼 소리도 듣는다. 요즘 모두들 힘드니까, 특별히 힘들 게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회사가 노동조합활동 했다고 제기한 손배소송에서 30억 원 임금압류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파업에 참여할 당시 한정희 조합원. 쟁의하는 여성조합원들 주변을 경찰이 애워싸고 있다.
▲  파업에 참여할 당시 한정희 조합원. 쟁의하는 여성조합원들 주변을 경찰이 애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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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

30억 원 압류가 결정되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2011년, 처음 회사가 301억 원의 손해배상을 노동조합과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들에게 청구할 때까지는 '저러다 흐지부지하겠지' 했다. 당시만 해도 평조합원에게까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없다고 알고 있었고, 나는 평조합원이었다. 301억 원, 워낙 상상도 안 되는 돈이다 보니까 현실감도 없었다. 

이후 6년 동안 1심 재판이 진행되면서 회사의 회유와 압박을 못 이겨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법원 조정이 결정됐다. 

지회는 손배소 당한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301억원이 30억 원으로 조정됐다고 했다. 30억 원을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같은 당사자들이 3년 동안 임금압류를 당해 갚는 거라고 했다. 말이 줄어든 거지 30억 원도 너무나 큰 돈이다. 그 큰돈이 '한 달 급여에서 15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이라고 설명되니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왔다. 설명 듣고 한참을 멍했다. 당장 다음 달, 10월 급여부터 적용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너무 멍해서 그 자리에서는 아무 표현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집으로 가려고 나와 차에 탔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확 현실감이 커져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KEC지회는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 사이 임금차이가 크다. 여성노동자의 급여는 기본급이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된다. 진급도 차별이 커서 여성노동자들은 직급수당을 많이 받을 기회조차 없다. 보통 격월로 나오는 보너스와 상여금으로 생계를 꾸려왔다. 상여금이 안 나오는 달이면 힘들다. 한 달 월급으로 한 달을 못 살지만, 두 달 월급을 합쳐 두 달을 살 수 있는 것도 이 격달로 나오는 보너스 덕이다. 그러다 보니 압류가 아니어도 가족 중 누가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압류라니. 압류는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기본급만으로 3년을 버티라는 소리였다.

"엄마, 나 알바할게... 학원은 다니고 싶어요"

그때도, 지금도 제일 미안한 건 가족이다. 내가 압류 이야기를 처음 전한 사람은 남편이다. 차에서 전화를 걸었다. 같이 착잡해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던 남편은 '집에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조심히 들어오라'고만 했다. 집에 가서도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아끼고 덜 쓰면 된다'고 말해주니까 그게 또 미안했다. 

 격달로 나오는 상여금과 보너스는 기본급이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KEC 여성조합원들에게는 꼭 필요한 생계비다. 3년간 임금압류는 꼭 필요한 생계비를 압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정희 조합원 압류명세서
▲  격달로 나오는 상여금과 보너스는 기본급이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KEC 여성조합원들에게는 꼭 필요한 생계비다. 3년간 임금압류는 꼭 필요한 생계비를 압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정희 조합원 압류명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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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냉정을 찾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는 걸 보면 심각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일찍 철이든 딸은 달랐다. 학원을 다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딸에게 이야기했더니 저 나름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엄마, 나 알바하면 안돼?"했다. "학원은 계속 다니고 싶어요. 학원 다니면서 성적이 좀 올라서, 지금 학원을 다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아", "엄마, 주말에 알바해서 학원비 벌어서 꼭 필요한 것만 다닐게"하고 말하는데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지금도 많이 짠하다. 이후 딸은 주말 아르바이트를 계속 한다. 스스로 돈을 벌어보니 경제력이 생기고, 적응이 됐는지 여유도 생기는 모양이다. "엄마가 더 아껴서 학원비는 보태줄게" 하니 이제는 용돈을 모아 가족 기념일에 곧잘 밥을 사겠다고 나선다. 

임금 압류 들어오고 남편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남편은 원래 허리디스크수술 이후로 계속 몸이 안 좋았다. 수술 후 재발한 케이스라 계속 병원 다니고 물리치료 받는 중이었다. 재수술을 생각하는 와중에 압류가 떨어지니, 남편이 다시 일을 찾았다. 실직 이후 트럭을 모는 일을 했는데, 전에는 몸이 아파 경북지역만 돌더니, 압류 소식을 듣자마자, 장거리 다니면서 '돌아올 때 짐 잡아서 내려 온다'며 차에서 쪽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신은 뛴 만큼 돈이 벌어지니까. 혼자 애를 많이 쓴다. 아직까지 아들은 철이 없으니까. 딸하고 남편한테 제일 고맙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이라더니

매달 압류가 들어오고, 달라진 일상에 허리띠 졸라보려고 가족 모두 고생을 한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나와 내 가족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회사가 직장폐쇄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여성기숙사에 용역을 투입시키는 일이었다. 한 여름 공장 점거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회사가 직장폐쇄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여성기숙사에 용역을 투입시키는 일이었다. 한 여름 공장 점거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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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8일에 입사했다. 대우전자에서 일하다 친구 소개로 이직을 했다. 당시 KEC는 '한국전자'라는 이름이었다. 삐삐나 전자키보드, 텔레비전을 만들었다. KEC는 수익성이 보인다 싶으면 사업을 벌이고 접는 게 빠른 회사였다. 그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사업성이 떨어져 라인이 망해도, 곧장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튜너(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주파수 맞추는 장치), 모듈(부품일종), 다음은 삐삐 같은 전자기기까지, 배치되는 부서마다 금방 망했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접고 지금까지 유지되는 게 반도체다. 지금 내가 일하는 부서는 자동차 부품 중 하나인 다이오드(반도체 일종)를 만드는 곳이다. 

KEC가 다른 건 몰라도 지역에서는 나름 여성이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라고 믿었다. 대기업공장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KEC는 결혼을 했다고 불이익 주지 않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동자들이 알아서 만족했다. 나만해도 부당한 일을 당해도 '회사는 어차피 돈 벌러 온 거잖아'하고 생각했다. 남녀임금차, 진급기회제한 같은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시키면 일하는 게 다였고, 그게 익숙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숙련되니까 스스로 조금씩 업무 욕심도 났다.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받고 싶었다. 3교대를 해도, 다른 팀 생산 물량 봐가면서 경쟁하기도 했다. 인사고과를 잘 받으면 포상도 받으니까. 

그런데 2010년 이후 그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회사가 공장부지에 주상복합 쇼핑몰을 세우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후 노동자들은 남녀할 것 없이 공장과 같이 '정리해야할 대상'이 됐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공장 밖으로 내쳐진 건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가장 먼저 공장 밖으로 내쳐진 여성노동자

회사가 공장폐쇄를 하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새벽에 여성기숙사에 용역을 투입하는 일이었다. 2010년 6월 마지막 날은 지금까지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됐다.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은 용역, 정문을 막아 선 컨테이너 박스, 기숙사를 쫓겨 나온 사람들의 울음소리. 우리는 쫓겨났다. 알아서 만족하며 안정적이라는 것 하나 믿고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는 꼭두새벽 용역을 투입해 끌어내고, 밀고 짓밟았다. 

나는 결혼해서 공장 밖에 나가있어서 직접 끌려나오는 일은 피했다. 그런데 폭력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끌려나온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공장을 점거했다. 늘 점거 인원보다 몇 배는 많은 용역들이 호시탐탐 노동자들을 노렸다. 여성노동자들은 화장실조차 맘대로 갈 수 없었다. 450명으로 시작한 파업참가 인원이 점점 줄어 막판에는 100여명 정도 남았다. 처음 불안하지 않으려고 가볍게 생각하려고 했다. 집회분위기도 즐겁게 이어졌지만, 우리 인원은 줄고 용역은 점점 늘었다. 

인원이 점점 줄어들면서, 한 명 나갈 때마다 서운함을 느꼈다. 물론 안쓰러운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가 아파서, 집에서 반대해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나라고 이유가 없었을까.

파업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걱정이 컸다. 하루는 파업현장, 하루는 집에서 잤다. 아이들을 제대로 챙길 여력이 없었다. 딸이 일찍 철이든 것도 내 탓인 것 같다. 직장이 3교대다보니 야간근무가 종종 있었다. 딸은 일을 하러 가는 줄 알고 있었다. 더 어렸던 아들은 외할머니네 데려다 줬다. 아픈 남편이 홀로 딸을 챙겼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떠날 수 없었다. 내가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내가 느낀 서운함, 서러움, 두려움, 그 기분을 다른 사람이 다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차마 나갈 수 없었다. 회사에 버려진 이 사람을 내가 또 버릴 순 없었다. 

조금 지나서는 악에 받쳤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 솟았다. 회사 다 밀고 주상복합 쇼핑센터 지으려고 했다는 이야기 나왔을 때는 의도적으로 다 내보내고 돈 되는 것 하려고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우리가 전문직종은 아니지만 숙련자들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농땡이 한 번 피운 적이 없었다. 나 빠지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메워야 하니, 휴가 한 번 쓰지 않고 일했다. 그런 우리를 돈이 안 된다고 고장 난 기계처럼 갖다 버린다고 하니까 허무하고 화가 났다. 

'나는 아니겠지' 나도 그랬다

사회적 합의로 1년여 기간의 파업이 끝이 났다. 파업은 끝났는데, 분위기가 삭막했다. 마지막까지 파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나는 파업 기간 회사와 용역들에게 수모를 당해보니까 공장에 돌아와서 오히려 깡다구가 생겼다. 그런데 7주의 교육기간동안 못 견디고 퇴사하신 분들이 많다. 

공장안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은 등급이 생겼다. 신입, 기존, 복귀. 우리는 '복귀', 파업 대오에서 벗어나 어용노조가 된 사람들은 '기존', 파업 기간 대체인력으로 뽑은 '신입'. 회사는 이렇게 공장 안 우리들을 갈라놨다. 복귀 후 새로 배치받아서 교육 받을 때는 우리끼리 모여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을 힘이 더 났는데, 배치 후에는 모두 떨어뜨려놔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일하는 면에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친구들도 많다. 이제는 그냥 웃음이 나온다. 우리도 처음엔 그랬다. 회사에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 내가 불이익을 볼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회사는 노동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회사에는 회사의 '돈 되는 사정'만 있을 뿐이다. 지금도 공장부지를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회사가 주상복합쇼핑몰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금 공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2010년이 우리에게 남긴 건 압류되는 임금만이 아니다.

지금 내곁에는 2010년과 이후 질곡을 함께 한 동료들이 있다. 똑같이 최저임금 수준을 제외한 나머지를 압류당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더하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하루하루 견뎌내는 동료들. 

그리고 지난 15개월, 불평한 번 없이 허리띠 졸라매며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다. 다들 살아보려고 한다. 딸에게 많이 고맙다. 가족이라도 팍팍한 삶에 서로 가시를 세우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딸이 중재도 한다. 크리스마스에 딸이 사는 밥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전 날은 아들 생일이다. 철 없는 아들은 생일선물 두 배로 달라고 한다. 마음은 몇 배를 못 줄까. 부자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압류가 풀리길 기다린다. 이제 21개월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