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C 임금압류 일지③ - 이미옥 조합원] 고통스럽던 임금압류 조정결정 과정

 

이 글은 30억 원의 손해배상을 갚기 위해 매달 회사로부터 임금이 압류되고 있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구미지부 KEC지회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압류 기록'입니다. 조합원 가운데 44명의 당사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6년 9월 20일, 법원 조정 명령에 따라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액 301억 원 중 30억 원을 3년 동안 임금에서 갚아야 합니다. 파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된 나라에서, 회사의 노조파괴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노동자가 겪어야 하는 모순된 현실을 기록하고 '노조 할 권리'의 현주소를 알리기 위해 해당 조합원들이 용기 내어 노동자 손배소 당사자의 임금압류 일지를 매달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 공개합니다(오마이뉴스 지면기사 : 30억 원 입금압류, 답은 정해져 있었다). - 기자 말

 KEC지회 파업 집회에 참여한 이미옥 조합원(왼쪽)
▲  KEC지회 파업 집회에 참여한 이미옥 조합원(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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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301억 원 손배소장')

저는 경북 구미에 위치한 KEC라는 반도체제조회사의 재고관리 부서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입니다. 입사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지만, 지금 제 월급봉투에 찍혀있는 금액은 최저생계비 수준에 못 미칩니다. 30년 근속수당을 바라는 건 고사하고, 야근을 해도, 명절이 되어도, 14개월째 통장에 찍히는 금액이 같습니다. 최저임금을 넘어선 금액은 회사가 도로 '압류'해갑니다. 지난 2010년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받은 게 2016년 9월부터 법원 조정 결정이 되어 '임금압류' 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KEC지회 조합원들을 대표해 법원조정에 참여한 노조 임원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매달 조합원들에 대한 임금압류가 진행될 때마다, 조합원들을 볼 때마다 가슴에 돌덩어리가 얹어지는 심정입니다. 내가 더 방법을 찾아봐야 했던 건 아닐까, 조정의 선택이 지금 우리 조합원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채권압류'가 찍힌 월급통장을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조정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30억 원의 임금압류를 피해갈 방법은 도무지 없었습니다.

2010년 회사가 청구한 301억 원의 금액은 1심이 진행되는 기간만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회사는 '퇴사하면 손해배상에서 제외시켜주겠다'는 확약서, 문자메시지, 관리자의 직접 회유 등을 계속하며,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301억 원이라는 금액을 당사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켰습니다. 6년 동안 꾸준히 '곧 선고된다고 한다', '3개월 후에 선고될 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다 압류되면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등 걱정하는 척 괴롭히는 이야기를 직장에서 계속 듣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1심 진행 기간 동안 청구금액에 대한 '감정'으로 2010년 301억 원이 2014년 156억 원으로, 다시 2016년에는 70억 원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금액이 청구된 것이 분명한데, 줄어든 금액조차도 감당하기 벅찬 금액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합원 수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700여 명에서 300여 명으로, 다시 150여 명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며 손배가압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손배가압류에 대한 위협이 일상이 된 6년을 보내고 나니 법원에서 조정절차를 결정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과, 30억 원이라는 금액, 매달 임금압류라는 방법까지 거론되면서 손배가압류가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30억이라는 손배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임원들은 매일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조합원들을 위해 조정을 해야 한다, 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의견충돌이 오갔습니다. 회의마다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세 자녀를 둔 아빠 조합원의 모습이, 아들을 혼자 키우는 싱글 맘인 조합원의 모습이, 매달 받는 월급으로 아픈 부모님의 병원비를 내야 하는 조합원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몇 날을 고민했지만, 조정 결정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법원에서는 30억 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보다 더 큰 금액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쌍용자동차지부와 같이 1심 선고가 나면 가압류가 바로 집행될 수도 있어 선고가 나면 다음 재판이 끝나는 기간까지 조합원들이 가압류로 인해 얻을 경제적 고통도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항소하려고 해도 수천만 원의 인지대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1심이 조정에 회부되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2심은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6년 동안 반의반으로 줄어든 노조가 2심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은 얼마나 더 많은 회사의 회유와 협박을 감당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노조를 지키려면 조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매달 9일, 급여봉투에 적힌 'KEC채권압류'

 이미옥 조합원 급여명세서, 격월로 상여금을 지급하는데, KEC의 여성조합원의 경우 상여금 미지급달에는 150만원 미만의 최저생계비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압류는 전체 수령액이 150원을 초과하는 상여금이 지급되는 달에만 가능하다.이미옥 조합원의 경우 30년 근속한 정규직 노동자이지만 근속과 관련한 수당이 따로 없다.
▲  이미옥 조합원 급여명세서, 격월로 상여금을 지급하는데, KEC의 여성조합원의 경우 상여금 미지급달에는 150만원 미만의 최저생계비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압류는 전체 수령액이 150원을 초과하는 상여금이 지급되는 달에만 가능하다.이미옥 조합원의 경우 30년 근속한 정규직 노동자이지만 근속과 관련한 수당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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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결정 이후 첫 급여 압류가 이뤄지던 날 이후 매달 전자급여봉투가 게시되는 9일, 늘 시끌벅적하던 노조 사무실에서 누구 하나 맘껏 웃을 수 없는 날이 됐습니다. 평소 유쾌하기로 소문난 우리 노조가 이날만큼은 서로 눈치를 보는 데, 그게 또 속이 상했습니다. 

임원을 맡았기에, 엄마, 아빠 조합원을 볼 때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미안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한 조합원은 집을 포기해야 했고, 한 조합원의 고등학생 딸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한 조합원의 아내는 어린아이들을 떼어놓고 길거리로 나가야 했습니다. 어떤 조합원은 아이들의 학원부터 끊어야 했고, 심지어 과자 하나 사주는 것도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제가 모르는 사이 주변에 걱정을 끼치게 됐습니다. 지난 설날 엄마는 저에게 "집에 갈 때 꼭 떡국이 든 가방을 가져가라"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혼자 있는 딸이 마음 쓰여 그러시나 보다 싶어 챙겨온 가방 속 떡국 봉지를 연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 봉지 속에는 꼬깃꼬깃 접혀 있는 5만 원짜리 지폐 4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암 수술을 받으신 엄마가 밭일을 해 받은 돈을 다른 자식들 모르게 챙겨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압류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된 엄마가 조금이라도 딸을 챙기려 애쓴 마음이 느껴져 마음 아팠습니다. 

열아홉, 회사가 전부라 믿었던 그때

 이미옥 조합원은 1988년 11월 kec에 입사했다. 재품관리 부서 등 사무직으로 30년째 근속했다.
▲  이미옥 조합원은 1988년 11월 kec에 입사했다. 재품관리 부서 등 사무직으로 30년째 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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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제가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떠나 구미라는 낯선 곳에서 홀로서 게 한 건 KEC입니다. 1988년 11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19살의 나이에 첫 직장으로 KEC에 입사했습니다. 부모님 곁을 떠나 낯설기도,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은 두근거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입사 후 한동안은 거의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했고, 어쩌다 한두 번 두세 시간 일찍 퇴근하게 되면 상이라도 받은 기분으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노조 활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든 생활에 있어 회사가 중심이었고 회사가 전부였습니다. 주말에도 영업에서 급하다는 전화가 오면 조금이라도 회사에 보탬이 될까, 오더가 늘어날까 하는 생각에 기꺼운 마음으로 출근했습니다. 휴일수당조차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고 하는 회사를 믿었고, 회사가 있어야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직장 동생들이 노조 관련 일정에 나가면 '뭘 그런 걸 하나'하는 생각에 도시락 싸 들고 말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회사는 저에게 무엇보다 최우선이었습니다. 2010년 이전까지는. 

2010년 6월 30일 새벽, 시커먼 옷을 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고 있는 여성기숙사에 들어와 여사원들을 끄집어내던 그 날,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쫓겨난 동료들의 긴급전화를 받으면서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하고 믿었던 회사가 절대 우리에게 이럴 리 없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문으로 달려간 제가 본 풍경은 눈앞에 가득 놓인 컨테이너 벽과 수백 명의 용역 깡패의 모습이었습니다. 파업했다고, 새벽에 맨발로 끌려 나와 울고 있는 동료들을 보며 회사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임금압류 고통에도 노조를 하는 이유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천막을 치고 애기를 데리고 노숙을 시작한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이번에 회사는 많은 준비를 했다.',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2000억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했다'는 등. 이 소문들은 2년여가 지나서야 당시 회사가 추진하던 '구조고도화 사업'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구조고도화는 공업용 부지를 백화점과 호텔을 지을 수 있는 상업용 부지로 팔아서 시세차익을 10배 이상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자연히 인력감축이 뒤따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노동조합이 걸림돌이 됐던 것입니다. 2012년 국정조사 과정에서 '인력구조조정로드맵'(노조파괴시나리오)이 드러나면서 모든 의혹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더 많이 가지고 싶어서 돈이라는 무기로 노동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도 싸우고 싶어서 목숨 걸고, 죽기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 몰리기에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였지만 20년 동안 노동조합에 관심조차 없었던 저 역시도 2010년 이후는 살기 위해, 쫓겨나지 않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의 정리해고와 공장폐업에서 노동자를 지킨 것은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  두번의 정리해고와 공장폐업에서 노동자를 지킨 것은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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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노조파괴시나리오라는 부당노동행위를 앞세워 두 번의 정리해고와 공장폐업을 시도했습니다. 불법에 맞서 공장을 지키고, 공장 안 노동자들을 지킨 것은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퇴사도, 노조 탈퇴도 아닌, 임금이 압류되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 조합원 모두 좀 더 행복한 내일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