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30 시사위크] 기업 ‘손배소 폭탄’ 1520억… 노동자들 숨이 막힌다

기업 ‘손배소 폭탄’ 1520억… 노동자들 숨이 막힌다
 
권정두 기자  |  swgwon14@sisaweek.com
 
   
▲ 노동자들에 대한 손배·가압류 소송 제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지난 30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렸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집회ㆍ농성ㆍ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부여된 권리다.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기업에 맞설 수 있는 법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권리를 법의 허점을 악용해 막아서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힘이 센 기업들이 노동자에게 제기하는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가 그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합법적 갑질’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해고자 피 말리는 손배·가압류 소송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영난 및 중국 상하이차의 ‘먹튀’ 논란 속에 대량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맞선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경찰과 노동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극렬하게 충돌했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경찰에 의해 진압됐고, 무려 64명이 구속됐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꾸준히 복직투쟁을 이어갔다. 지난해에도 70m 높이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 이들이다. 다행히 현재는 기나긴 갈등이 봉합됐다. 지난해 쌍용차가 출시한 신차 티볼리가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해고자 복직의 길도 열린 것이다.

이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무려 26명의 해고자 및 그 가족이 자살 또는 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순히 억울하게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회사와 경찰 측이 제기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는 그야말로 피를 말리게 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제기된 손배·가압류 소송은 한때 총 235억원에 달했다.

지금은 복직 합의와 함께 쌍용차 노조 조합원에 대한 소송이 취하(금속노조 등에 대한 일부 소송은 진행 중)됐지만, 손배·가압류 소송은 여전히 많은 곳에서 노동자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 민주노총 산하 조직에만 1521억원… ‘입막음’ 수단으로 악용

지난 30일, 국회 정론관에서는 이 같은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및 이용득 의원, 민주노총, 한국노총, 그리고 손베·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손잡고’가 함께했다.

 

   
▲ 노동자들에 대한 손배·가압류 소송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서는 노동자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뉴시스>

민주노총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현재 민주노총 산하 노조에 제기된 손배 소송의 규모는 1521억원에 달한다. 가압류 규모도 144억원이다. 총 20개 사업장에서 57건의 소송이 걸려있다. 민주노총에 속하지 않은 노조나 노동자 개인에 대한 소송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노조 및 노동자에게 제기된 손배·가압류 소송은 수백억대(민주노총 기준) 였다. 그랬던 것이 2011년엔 1582억원까지 치솟았고, 이후 줄곧 1500~1600억원대를 오가고 있다.

기업들은 노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막대한 피해를 배상받기 위한 정당한 법 절차라는 입장이다. 한 기업관계자는 “공장이 멈추고, 업무가 마비됨에 따라 발생하는 피해는 회사의 실적으로 이어진다”며 “또 제때 생산을 하지 못해 대외 신뢰가 추락하기도 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피해라 할 수 있다”며 손배·가압류 소송 제기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노동계의 시각은 다르다. 손배·가압류 소송이 노동자들의 입을 막고, 권리를 침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막대한 규모의 손배·가압류 소송을 걸어놓고, 소송 취하를 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손잡고 측은 “손배·가압류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노동자가 제기한 소송의 취하나 노조 해산 또는 탈퇴, 퇴사 또는 복직 포기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주장했다.

손배·가압류 소송이 점점 무분별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 가지 사례를 보자. 2010년 노사갈등을 빚으며 파업과 직장폐쇄를 겪었던 상신브레이크는 노조 간부를 상대로 10억원의 손배 소송을 제기했다. 노조의 파업에 맞서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대체인력을 투입했으면서도 10억원의 손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여기엔 노조의 출입을 막기 위해 동원한 용역 비용까지 포함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회사의 명성이 일부 손상된 점만 인정해, 위자료 500만원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구호나 피켓 등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손배 소송이 제기될 뿐 아니라, 원청의 책임을 요구하는 협력업체 노조에 대해 ‘원청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노동계 관계자는 “기업은 법무팀에 맡기거나, 로펌 등을 구해서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노동자 개인의 경우 대응을 위한 비용이나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며 “기업들은 애초 승소 가능성이 적은 소송이라 하더라도, 대법원까지 끌고 간다.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개인 혹은 소규모 노조가 얼마나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 19대서 무산된 ‘노란봉투법’, 20대는 해낼까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손잡고'는 쌍용차 손배·가압류 사태에서 출발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47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지자, 이 소식을 접한 한 시민이 “4만7000원씩 노란봉투에 담아 보내자”고 밝히면서, 시민모금캠페인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것이 '손잡고'의 모태가 돼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손잡고'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른바 ‘노란봉투법’이다. 합법적 쟁의행위 대상을 늘리고, 노동자의 손배 책임은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손배 폭탄’을 막을 수 있도록 손배 청구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내용도 있다.

정확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인 이 법안은 지난 국회에서도 입법이 추진됐지만 무산됐다. 정리해고에 맞선 파업 행위를 합법으로 인정하는 것을 두고 여야의 시각차가 컸다. 20대 국회에서도 입법이 추진되겠지만, 난항이 예상된다. 정리해고를 더 쉽게 하겠다는 정부ㆍ여당의 기조와 전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손잡고' 관계자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는 기업의 ‘합법적 갑질’을 막기 위해 법안 개정이 시급하다. 지금도 많은 노동자들이 손배·가압류 소송으로 인해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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