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1 오마이뉴스] 대학로의 '대세' 거스른 연극, 다시 볼 수 있을까

대학로의 '대세' 거스른 연극, 다시 볼 수 있을까

[리뷰] 연극의 '본령'에 충실했던 사회비판극 <노란봉투>와 <정의란 무엇인가?>

연극의 본령은 사회비판이다.

연극은 민중친화적인 문화 콘텐츠다. 오페라가 귀족적 향유물이라면, 연극은 밑바닥 감성의 집합체다. 저잣거리에서 행해지던 마당극이 그 원형이고, 양반을 조롱하던 말뚝이가 캐릭터다. 대놓고 나라님과 윗사람을 욕할 수 없었던 이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한을 풀어냈다. 한때는 신을 찬미하기 위해 탄생했던 놀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극은 신이 아니라 사람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연극은 대중과 함께, 대중의 바람을 드러내며 부조리한 현실을 조롱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극이 비판 정신을 견지한 이유다.

현대에 와서 뮤지컬이 대중화되고 오페라의 소비층도 점차 넓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손에 쉽게 닿는 건 오페라나 뮤지컬보다 연극이다. 더 싼 가격에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어서만이 아니다. 단출한 무대도 몇 가지 소품만 있으면 훌륭한 연극마당이 된다. 관객과 더 긴밀하게 소통하고, 깊이 있게 호흡하는 건 연극만의 장점이다.

하루에만 수십 개의 연극 공연이 올라오는 대학로이지만, 그중 연극의 '본령'을 지키는 극은 찾기 어렵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연극판, 그나마 '돈'이 되는 부류의 연극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연인을 공략한 로맨틱 코미디나 여성 관객을 위한 브로맨스(Brother + Romance)가 상연되는 연극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사회 비판적인, 풍자적인 연극은 쉬이 찾기도 어렵고, 주목을 받기도 쉽지 않다.

이런 와중에 5월 한 달을 뜨겁게 달궜던 두 편의 연극이 있다. 지난 10일 막을 내린 연우무대의 <노란봉투>, 지난 17일 마지막 공연을 펼친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다른 듯 닮은 두 연극, <노란봉투>와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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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연극 <정의란 무엇인가?>가 시작되기 전 초등학생 종심이 역을 맡은 배우 김민주씨가 사전을 펼쳐놓고 있다. 연극은 종심이가 학교 숙제를 위해 '정의'의 뜻을 찾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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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는 손해배상·가압류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모임 '손잡고'와 연우무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관련 기사 : 세월호를 기억하는 당신, 이 연극 어때요) 연우무대 64번째 정기공연으로 올라온 이번 극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세월호 참사와 쌍용차 문제를 폭로하며 지난 2014년에 이어 두 번째로 관객과 만났다.

연극은 2014년 4월 16일 즈음, 안산에 위치한 SM기계 노동조합 사무실을 비춘다. 정리해고 반대 파업이 끝나고, 노조 사무실에 모인 조합원들은 뉴스 인터뷰를 준비한다. 평온하던 극은, 한때 노조원이었다가 사측에 붙은 '강호'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팽팽한 긴장의 끈이 조성된다.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긴장한 채 극 속에 빠져든다.

<노란봉투>는 결코 세련된 극이 아니다. 우아하지도 않고, 여러 실험적 장치를 마련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투박하다. 매끄럽기보다는 거칠다. 극은 시종일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자동차 부품 '벨로우즈'의 상징, 밥과 삶이었다가 해고와 죽음으로 바뀐 노란 봉투, 언론의 프레임, 어용노조, 심지어 같은 투쟁 사업장임에도 차별받는 열악한 환경까지 현실의 이야기가 일관된 감정 톤을 가지고 쉴 새 없이 화살이 되어 꽂힌다.

극단C바이러스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노란봉투>와 많이 다르다. 전작인 <민중의 적 : 2014>와도 또 다르다. <오마이뉴스>와 미에로화이바가 후원한 이 극은, 현대극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단 6일간 관객과 마주했다. (관련 기사 : 무대에서 펼쳐지는 '정의'의 아홉 가지 몽타주)

<노란봉투>가 한 가지 목표를 정밀 조준하여 '저격'하는 극이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융단 '폭격'한다. 마이클 샌델의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와 제목이 같은 이 작품은, 한 가지 질문을 여러 다른 방법으로 던진다. 형식도 천차만별이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각각의 단편 이야기는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자칫 정신없을지 모르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때로는 관객을 웃게 만들었다가, 때로는 한탄이 나오게 한다. 몇 가지 없는 소품을 활용하는 '센스'도 일품이며, 이야기별로 극의 색깔도 다변한다. 흰색의 빛을 프리즘으로 표시하면 일곱가지 색이지만, 그 색은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빛으로 수렴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런 작품이다.

<노란봉투>가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로 꽂히는 빠른 직구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스트라이크 존 외곽에 면도날처럼 꽂히는 변화구다. 둘 다 스트라이크를 노리지만, 노리는 폼은 천지 차이다.

동시에 두 작품에는, 사회비판의식을 견지한다는 것 이외에도,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 두 작품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노란봉투>에는 투사와 변절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투쟁 과정에서 각 캐릭터는 여러 가지 분기점에 놓이게 되고, 그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후회하는 인물이다. 어떤 편에 서 있든지, 그들 모두 본질적으로 '악인'이 아니다. 전혀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위해 투쟁에 매진하는 이들도 아니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고, 월급을 걱정하면서 지키고 싶은 가치도 있는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다. 여직원을 못살게 구는 관리자는 사실 더 윗사람으로부터 시달리는 사람이고, 그 와중에 성희롱 당하는 부하 직원을 지켜주려 노력한다. 같은 반 동성이를 괴롭힌 반장은, 실은 그 친구의 편지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소년이다. 특정 권력층을 대변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름을 가진 채 목소리를 내는 모든 인물이 사실은 '갑'과 '을' 사이에 끼어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흔히 '갑질'을 욕하지만, 삶 어디에선가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모순적 개인인 점을 미묘하게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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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9일, 연극 <노란봉투>가 끝나고 홍기탁 스타케미컬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부대표가 관객과의 시간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노란봉투>는 실제 투쟁 사업장에 있는 이들이 극 안으로 들어오며 현실과 극의 경계를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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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의 이야기인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이야기가 가상이 아니라 시대에 발붙인 현실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두 작품은 현실과 극의 경계를 때려 부순다. 실제로 투쟁 사업장에서 싸우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노란봉투>, 실제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여러 인물의 인터뷰를 실은 <정의란 무엇인가?> 모두 극을 무대 안에 갇힌 이야기로 두지 않는다. 그 새장을 깨고 현실로 뛰어든다. 과감하게, 벽을 향해 달려 드는 달걀처럼.

결국 이 모두가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두 작품 모두 누군가를 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화합을 얘기한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동지 옆에 선 노동자. 흘러나오는 민중가요에 함께 춤추는 이들. <노란봉투>의 마지막은, 결국 내 옆에서 손잡아주는 사람과 함께 이 길을 헤쳐나갈 것을 선언하며, 우리 모두 흔들리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갈등 관계에 있었던 모든 캐릭터가 서로 화해하고 포옹하며,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분리하는 것이 정의가 아님을 명확히 한다.



공연이 끝났다고, 연극이 끝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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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노란봉투>의 한 장면, 극 중 고공농성에 돌입하는 노동자 병로와 강호의 모습
ⓒ 손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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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장면. 극 중 다양한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서로 하나로 화합한다. 갑과 을의 경계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도 사라진다.
ⓒ 극단C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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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가 묻는다. "자본가들은 돈으로 뭉치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뭉치는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라고. <정의란 무엇인가?>도 관객에게 질문한다. "무엇이 진짜 정의인가?", "어떻게 정의를 정의할 수 있는가?"라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쉬이 찾을 수 없다. 두 연극이 앞으로도 생명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질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발견될 때까지의 '유통기한'을 갖는다. 좋은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다. 걸작은, 미학적 완성도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본질적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 인류를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할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탄생한다.

그래서 두 작품 모두 짧은 공연 기간이 아쉽다. 이처럼 좋은 극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대중과 호흡하며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 '책임'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흔히 공연 기간이 끝나면, 다시 무대에 오를 때까지 그 연극의 생명력은 다한 것처럼 보인다. 실은 그렇지 않다. 무대에 오르는 1주일, 1개월의 시간만이 아니라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과 그 이후까지도 연극에 포함된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며, 사람과 호흡하는 게 모두 연극이라면 말이다.

<노란봉투>를 함께 만든 '손잡고'는 지금도 투쟁 중이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투쟁 사업장의 노동자가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화 시간에 있었던 미니 강연을 SNS에 공유한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문화제를 열며 연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도,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집단창작극이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부하며 만들어졌다. 연극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작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였다. 여러 사람이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물음 자체가 연극의 일부가 된다. 사람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내린다. 이 작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9가지로 변주되는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의 가장 핵심은 '유니콘 이야기'이다. 정의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한목소리가 답한다. "정의는 유니콘과 같다"고. 보이지는 않고,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정의. 그리고 목소리는 말한다. 어딘가에 정의가 반드시 있다고 "믿어보겠다"고. 지난 12일 첫 공연이 끝난 후 <정의란 무엇인가?> 드라마터그를 맡은 이문원 연출은 "배우의 친구 중에 실제 백화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분에게 들은 답변"이라며, "연출한 내용이 아니라, 그 분의 실제 목소리를 가감없이 실었다"고 답했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곧 연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작품을 보고 나면 또 하나의 모순된 감정이 떠오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와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노란봉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질' 문제와 군대 내 폭력이 없었다면, 이 사회에 정의라는 것이 바로 서 있었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창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역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면 두 연극은 대중과 마주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질곡이 해결되어, 더 이상 이 작품이 '의무감'을 가지고 재연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가슴 속 어딘가에서 움튼다.

대학로의 '대세'를 거스르고, 이 작품들이 다시 올라올 수 있을까. 연극의 본령인 이 작품들이 더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까. 두 작품이 고발한 사회문제가 해결되어, 언젠가 불편한 마음 없이 이 작품들을 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오리라. 그때까지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행동치 않고 대체 뭘 할 수 있나" 싶은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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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노란봉투>의 포스터
ⓒ 연우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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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정의란 무엇인가?>의 포스터
ⓒ 극단C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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