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0.08 시사인368호] “아빠 노릇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빠 노릇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 차비조차 주지 못했던 아빠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남편이, 노모 병구완에 쩔쩔매던 아들이 오랜만에 ‘가장 노릇’을 했다. ‘노란봉투’는 우리 사회가 해고자에게 처음으로 내민 손이었다.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
 
 
빈칸 앞에서 서성인다. 이 서류를 작성하려면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파업 이후 일손을 놓은 지 수년. 평생 만져볼 일 없는 ‘억’ 소리 나는 금액은 손해배상이라는 명목으로 목을 조인다. 은행 빚은 지려야 질 수도 없었다. 부모·형제·친구 빚 따위 ‘증명할 수 없는 빚’이 태반이다. 그렇게 경제적 파산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끊어졌다. 파업 참여의 대가치곤 혹독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손 벌릴 곳도 없을 때 ‘노란봉투’를 만났다. 노란봉투라면 몇 년 전에도 받아본 적 있었다. 그 안에는 해고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7월7일 4만7547명의 시민이 노란봉투에 십시일반 모은 14억6874만1745원에 대한 1차 기금 집행이 있었다. 137가구에 5억2000여만 원이 전달됐다. “마침 아이 등록금 납부 기간이었습니다. 휴학시켜야 하나 걱정했는데 아빠 노릇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4명 가족이 굶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송하다, 고맙다, 용기가 난다…. 1차 기금 집행 이후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기구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가 노란봉투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들을 대신해 수십 번의 인사를 받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8월25일부터 2차 지원 신청을 받았다. 손잡고 활동가들이 신청서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8월25일부터 2차 지원 신청을 받았다. 손잡고 활동가들이 신청서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노릇.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이 신청서에 가장 많이 적어낸 말이기도 했다. 학비는커녕 학교 갈 차비도 줄 수 없어서 미안한 아빠가, 몇 개월째 밀린 가스·전기요금 고지서를 붙들고 있는 우울증 걸린 아내를 보며 참담한 남편이, 모셔야 할 노모의 병구완에 쩔쩔매는 아들이 거기 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선물을 손에 들고 추석 때 부모님 찾아뵙니다.” 노란봉투 덕분에 아빠는, 남편은, 아들은 오랜만에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긴급을 넘어 ‘지속’을 생각할 때 


8월25일부터 접수한 2차 지원 신청서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지원 예산은 6억3000여만 원. 193여 가구가 지원을 요청했다. 기업은 파업 당사자에게만 손배·가압류를 걸지 않았다. 파업 당시 연대한 다른 노조와 시민단체 활동가에게도 손배·가압류 ‘폭탄’이 떨어졌다. 2차 지원자 중 20여 명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심사위원 5명(위원장 김두식 경북대 교수,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수호 한국갈등해결센터 상임이사, 이숙이 <시사IN> 편집국장, 좌세준 변호사)은 10월 초 심사를 마무리하고, 10월 중순께 기금을 집행할 예정이다.


우리 사회가 해고자에게 처음으로 내민 손이 노란봉투였다. 긴급 생계비와 의료비 지원으로 어쩌면 급한 불은 껐는지도 모른다. 손잡고는 이제 ‘긴급’을 넘어 ‘지속’을 생각한다. 만해대상 특별상(<시사IN> 제362호 ‘여러분 상 받으셨어요’ 기사 참조) 상금 5000만원을 별도 계좌를 만들어 적립해둔 이유다. 일회성 긴급 지원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손배·가압류 피해 가구를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 중이다.


11월에는 손배·가압류를 소재로 한 ‘손잡고 연극제’도 열린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가 무상으로 공간을 내줬고, <일곱집매>의 이양구씨가 대본을, <목란언니>의 전인철씨가 연출을 맡았다. 백서 작업과 로스쿨 학생을 대상으로 한 모의 법정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