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02 주간경향 1091호] [비상식의 사회]파파가 떠난 자리, 우리의 몫이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억울하고 힘들어하는 이웃이 있는가 살펴보아라. 알았으면 그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에게 맞게 실천해라.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고, 진리와 함께하려는 길이다.”


그를 누구는 교황이라고 불렀다. 황제라는 권위와 종교적 신비로움이 깔려 있다. 누구는 교종이라고 불렀다. 그냥 한 종교의 우두머리란 의미와 함께 교황보다는 겸손한 느낌이 들어 괜찮아 보였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교종으로 불러달랬다니, 그의 사람 됨됨이와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부르던 그게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가 우리나라를 다녀간 4박5일은 종교와 상관없이 국민 대부분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고, 이런저런 일로 힘들고 마음 아픈 사람들은 그의 발걸음을 따르며 위로를 받았다. 어떤 젊은 엄마는 그가 군중 사이를 지날 때 인자한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드는 모습만 보고도 왠지 기분이 좋고 울컥했는데, 차를 세우고 아이를 안고 볼을 비벼주는 장면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엉엉 울었단다.


왜 이랬을까? 그가 천주교의 우두머리이긴 하나 우리나라는 불교나 개신교 신자가 훨씬 더 많다. 그가 바티칸 공화국의 수반이기는 하나 실질적인 외교적·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 이 종교나 국가를 뛰어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현재 힘들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로 향한 그의 인간애적 진정성과 어려움을 함께하려는 과감한 실천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나라의 두 분 추기경과 수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어찌 이걸 모르겠는가?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왜 이 생각을 못하겠는가? 다만 진정성이 없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존경받기는커녕 조그마한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7일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에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인간애적 진정성과 과감한 실천력


자본주의의 망종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부의 양극화 현상은 극심해지고 있고, 그 그늘은 깊어지면서 풍요 속의 가난이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는 때이다. 이 현상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 책임을 질타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며 위로하는 것은 지성의 일이며 지도자의 몫이다. 프란치스코는 종교지도자로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그 현상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를 방문해 적절히 행동함으로써 큰 감동과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그가 예정된 종교행사 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과감하게 실천하며 했던 행동과 말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며 그 유족을 여러 곳에서 만나고, 특히 광화문 농성장 앞을 지날 땐 차에서 내려 단식 중인 유민이 아빠를 직접 만나 위로하고, 그가 달아준 노란 리본을 정치적 중립 어쩌고 하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달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진정성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깊은 공감력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나라 책임 있는 정치나 종교지도자들도 외면해온 용산 철거민 참사나 쌍용자동차의 불법 집단정리해고 문제, 제주 강정마을의 군사기지나 밀양 송전탑 건설, 심지어는 역사 속에 묻혀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까지도 관심을 표하며, 그 관련자들을 위로하고 함께하려는 그 태도가 우리에게 한없는 믿음과 위로, 그리고 희망을 준 것이다.



적어도 지도자는 이렇게 스스로 낮아져서, 더 낮은 곳으로 더 험하고 힘든 곳으로 더 고통스러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을 통해 남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마치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스스로 목숨을 던진 후 부활하여, 불신과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내 양을 먹여라”고 마지막 당부를 하신 것처럼, “이제 당신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라고 부탁하며 우리를 떠난 것 같다.


쌍용자동차 집단해고 사태는 회사가 회계장부 조작을 통해 회사의 경영상태를 거짓 평가함으로써 생긴 잘못된 정리해고임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노조는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해고 조합원들의 억울함과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법의 비호를 받은 부도덕한 자본과 국가권력에 의해 처절하게 깨지고, 몇 년이 지나는 동안 26명이나 죽어갔다. 그뿐 아니라 파업기간에 있었던 모든 피해의 손해 책임을 재판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지웠다. 손해배상과 가압류 금액이 47억원에 달했다. 집 등 재산은 물론 봉급도 차압을 당했다. 해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복귀자도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애들 학원은 물론 병원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힘든 곳으로


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어느 주부가 같은 노동자의 아내로, 아이들 엄마의 마음으로 자기 아이 태권도 보낼 돈을 아껴 4만7000원을 노란봉투에 넣어 편지와 함께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는 전체의 10만분의 1이지만 우리가 마음을 모으면 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호소를 했다. 이 4만7000원의 노란봉투는 사연과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물어, 유명 연예인에서부터 고사리손 어린 학생들에까지 이어지며, 1차 마감의 짧은 기간에 무려 4만7547명이 참여해 14억7000만원 이상이 모여, 생계가 다급한 손배 가압류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손잡고’라는 단체는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운동을 더욱 폭넓게 펼쳐 어려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는 한편, 잘못된 법을 고치는 일과 함께 사용자들이 함부로 손배 가압류를 요구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법원도 사용자 편만 들어 함부로 판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여론작업도 꾸준히 펼쳐나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억울하고 힘들어하는 이웃이 있는가 살펴보아라. 알았으면 그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에게 맞게 실천해라.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고, 진리와 함께하려는 길이다.”


우리나라도 이주노동자 100만명 시대에 육박하고 있다. 저임금 3D 업종은 거의 그들의 몫이다. 노동운동은 물론 사업장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최근에는 또 법이 바뀌어 퇴직금을 출국 뒤에 받도록 함으로써 더 힘들게 됐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경제가 이만큼이라도 돌아가는 게 이 이주노동자들 덕이라는 사실은 잊고 산다.


그런데 이러한 악조건과 저임금이라도 받기 위해 기를 쓰고 우리나라에 오는 노동자들의 본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가난과 미개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겨우 초등학교 다닐 아이들도 여러 가지 형태의 아동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학교가 없어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일이라도 시킨다고 한다.

 

이런 나라에 학교라도 지어주자고, 노동자들이 나서고 교사들이 함께하며 관심 있는 시민들이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사)이주노동희망센터이다. 방글라데시와 네팔에 희망학교를 지어 노동을 멈춘 아이들 손에 연필을 들려주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학교를 짓고 지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뭘 해줬으니까가 아니라 그들이 어렵고 힘드니까 국경을 넘어서라도 내가 갈 수 있는 만큼 다가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파파 프란치스코가 수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온 진짜 이유가 아니겠는가?


교황이 지나간 광장에 일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유민이 아빠의 단식은 계속되고 있고, 쌍차 정리해고자들은 여전히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러나 교종으로 스스로를 낮춘 파파 프란치스코의 그 진정한 마음과 실천의 모습은 작은 씨알이 되어 우리 마음에 뿌려졌다. 그것을 잘 보듬어 싹 틔우고 키우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이수호 한국갈등해결센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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