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6.28 한겨레] 고스톱 따도 나눠주던 형의 급여는 8만3000원

지난 12일 오후 두산중공업 해고자인 김창근씨와 경남 창원시 귀곡동 두산중공업 본사 앞에 있는 ‘노동열사 배달호 추모비’를 찾았다. 추모비 뒤편엔 배달호씨가 친필로 쓴 유서가 새겨져 있다. 창원/윤형중 기자
▲지난 12일 오후 두산중공업 해고자인 김창근씨와 경남 창원시 귀곡동 두산중공업 본사 앞에 있는 ‘노동열사 배달호 추모비’를 찾았다. 추모비 뒤편엔 배달호씨가 친필로 쓴 유서가 새겨져 있다.
창원/윤형중 기자

[토요판] 손잡고 / 손배가압류의 현장

(2) 배달호의 동지들
▶ 1989년 9월20일 통일중공업(현 에스앤티중공업)은 노동쟁의를 이유로 노동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머지않아 기업들은 ‘손해배상 가압류’가 노동자들을 옥죄는 좋은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손배 청구 건수는 1989년 1건에서 1990년 10건, 1991년 23건으로 늘죠. 그러던 중 2003년 한 노동자가 죽음으로 손배 가압류의 잔혹함을 고발합니다. 11년이 지났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손잡고 공동 기획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경남 창원시 귀곡동의 두산중공업 정문 앞에선 매일 아침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시위를 한다. 두산중공업에서 2002년에 해고된 전대동(52), 김춘백(48)씨다. 지난 13일 아침 7시에도 전씨와 김씨는 어김없이 두산중공업 정문 앞을 찾았다. ‘원직 복직’이란 글씨가 적힌 빨간 조끼를 입은 이들은 ‘법과 원칙 이중잣대 두산자본 규탄한다’는 펼침막을 들고서 한 시간 동안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해고자란 걸 회사가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거의 매일 여기 나와요.”
머리카락이 희끗한 전씨가 정문으로 들어오는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들이 정문 앞을 지날 때마다 이들은 창 너머 운전자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무심하게 지나치는 차들이 더 많다. 간혹 운전자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면 이들도 손을 들며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정문 앞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출근하기 때문에 얼굴조차 볼 기회가 없다.

정문 앞에서 한 시간여 보낸 뒤에 이들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200여m를 걸었다. 대로변인 그곳엔 ‘노동열사 배달호 추모비’가 서 있다. 추모비 받침돌엔 “두산중공업의 노조 말살 정책인 손해배상 가압류, 해고와 구속에 항거하여… 자기 몸을 불살라 산화해 가신 배달호 열사의 정신을 받들어… 이 돌을 세웁니다”라고 적혀 있다.
“출근시위를 끝내기 전에 여기 들러서 달호 형님한테 인사하고 가요. 11년간 바뀐 게 없다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죠.”

교도소 수감과 정직 3개월 뒤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해도 배달호는 집에 생활비 못 줬다 임금이 가압류됐기 때문이다 11년간 변한 건 별로 없다

아직도 두산중공업 정문 앞에선 배달호의 동지들이 시위를 한다 파업 이유로 해고당한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법과 원칙’ 그러곤 배달호 추모비로 향한다
노동자광장 바닥에 까맣게 타버린 주검

2003년 1월9일 새벽 대여섯시께 두산중공업 노동자광장에서 보일러공장의 노동자였던 배달호(당시 50살)씨가 분신해 숨졌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침묵과 어둠 속에서 몸을 불살랐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맣게 타서 차가운 바닥에 붙어버린 주검만이 공장 안에 남았을 뿐이다. 전씨는 “배달호 형님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옆 동료들에게 좀 시켜도 될 일을 굳이 일찍 출근해 혼자서 한다. 고스톱을 칠 때도 따면 다 나눠주고 사비까지 털어 차비를 챙겨주지만, 자기가 잃으면 차비 받을까 싶어 퍼뜩 나간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하고, 자기가 고생하는 것을 남에게 알아 달라고 하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배달호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탄압 수단으로 악용되는 ‘손배 가압류’를 사회적인 의제로 만들었다. 두산중공업은 2002년 6~7월 세 차례에 걸쳐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을 상대로 65억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했다. 1989년 9월20일 통일중공업이 ‘노동쟁의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을 처음 청구한 이래 손배 가압류는 신종 노동자 탄압 수단으로 유행처럼 번졌으나, 노조 간부뿐 아니라 일반 노조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기업은 두산중공업이 처음이었다. 쟁의가 끝나면 손해배상 청구를 취소하는 관례도 두산은 따르지 않았다. 노조원들은 조합비와 임금뿐 아니라, 살고 있던 집마저 가압류됐다. 노조 대의원이던 배달호씨는 ‘불법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2달여간 마산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석방된 이후 3개월간의 정직 조처를 받았다. 이런 중징계를 받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을 해도 그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주지 못했다. 임금이 모두 가압류됐기 때문이다. 전씨가 공개한 당시 배씨의 급여명세서를 보면 2002년 6월부터 12월까지 급여로 받은 돈은 8만3000원이 전부였다. 배씨의 죽음으로 손배 가압류 문제가 대두되자, 당시 당선자 신분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양대 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조합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몰라도 개별 노동자에게 (손배 가압류를 청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교섭력도 떨어뜨리므로 개선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배 가압류의 칼날은 무뎌지지 않았다.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주익, 곽재규씨마저 손배 가압류 철폐를 외치며 사망하자, 그해 12월엔 노동계, 재계, 정부가 모인 노사정위원회에서 ‘손배 가압류 관련 노사정 합의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합의문을 보면, 정부는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위법행위를 방지하는 동시에 손배 가압류의 남용 방지 및 제도의 보완에 최대한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11년이 지났다. 배달호의 동지들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해결되지 않은 손배 가압류의 문제를 어떻게 지켜봤고,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인 ‘노란봉투 캠페인’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지난 12일 오후 창원 상남동의 노동사회교육원에서 배달호의 동지이자 두산중공업 해직자들을 만났다. 배달호 열사가 사망했을 당시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위원장을 맡았던 김창근(59)씨, 경남지부장이던 김춘백씨, 두산중공업지회장이던 강웅표(55)씨, 부지회장이던 전대동씨가 모였다. 이들은 배달호씨와 같은 공장에서 십수년간 동고동락했고,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의 회장을 돌아가며 맡았다. 현 회장은 강웅표씨다.
-배달호씨가 사망하고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복직투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김창근 “2002년 6월 한달여간 전면 파업을 하고서 무려 620명이 중징계를 받았다. 그때 18명이 징계 해고됐고, 배달호 열사를 비롯한 22명이 정직을 당했다. 그 뒤로 복직투쟁을 전개해 우리를 제외한 14명은 2004~2005년에 복직됐다. 우리 4명은 아직도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중이다.”

-회사 정문 앞에서 시위할 때 ‘법과 원칙’이 쓰인 펼침막을 들었다. ‘법과 원칙’은 정부나 재계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아닌가?
김춘백 “노동자와 기업가에게 들이대는 법과 원칙의 잣대가 다른 것이 문제다. 2001년 노조와 회사는 이미 이듬해 임금단체협약을 ‘집단교섭’(산별노조인 금속노조와 같은 지역의 여러 기업들이 집단으로 교섭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으나, 2002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10차례의 집단교섭에 두산중공업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경남노동위원회의 조정을 거쳤고, 조정기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아 노조원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파업을 진행했다. 그런 노조를 상대로 회사는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대규모 징계와 손배 청구로 맞섰다. 하지만 배달호 열사가 죽고 난 뒤인 2003년 2월 방용석 당시 노동부 장관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2002년의 두산중공업 파업은 합법이었다’고 밝혔다.”

배달호의 친구이자 두산중공업 해고자인 전대동(오른쪽), 김춘백씨는 매일 아침 7시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 본사 앞에서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다.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배달호의 친구이자 두산중공업 해고자인 전대동(오른쪽), 김춘백씨는 매일 아침 7시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 본사 앞에서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다.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일반 조합원 가압류는 생각도 못해
-그런데도 결국 쟁의행위가 불법이 됐다.
김창근 “그전에 파업을 불러일으킨 두산의 부당노동행위부터 따져야 한다. 두산 경영진은 부당노동행위로 2006년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판결은 배 열사가 죽고 난 뒤 조합에 쏟아진 제보들이 결정적이었다. 제보를 보면, 회사는 ‘건전 세력’을 육성한다는 미명 아래 노조원들에게 불이익을 줘서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고, 직원들을 사찰했다. 임원 수첩에는 ‘(징계를 내리려면) 2~3일간의 파업으로 안 되고, 이번 기회에 문제 해소’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등 파업을 유도한 정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받은 형량은 고작 벌금 수백만원이다. 노동자들에겐 돈이 없다고 징역을 때리고서 민사상으로도 손해배상을 청구받는데, 기업가들은 그들에게 부담스럽지도 않은 벌금 처분을 받는다. 이게 공정한 법인가. 또한 2002년 파업이 격해진 이유는 회사 쪽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완제품과 재료 등의 물품을 반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량이 반출되면 노조는 교섭력을 잃는다. 이 때문에 노조법에서도 쟁의 중 외주화 혹은 하도급화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회사 쪽은 용역을 동원해 물량 반출을 시도하고, 이를 막는 노조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되면 양측의 충돌이 불가피한데, 불법 딱지가 붙는 것은 노조뿐이다. 한 회사 간부는 물량 반출을 제지하는 한 노조원을 차 앞덮개에 매달고서 1㎞ 넘게 달리기도 했다. 살인미수나 다름없는 행동이지만, 이런 행위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두산중공업의 노사 갈등은 2000년 12월 한국중공업이 민영화돼 두산이 인수할 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한국중공업의 지분 36%를 3057억원에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한 두산은 2001년 3월 비용 절감을 이유로 1124명의 인원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명예퇴직을 종용하는 사실상의 정리해고였다. 두산에 인수되기 이전의 한국중공업은 4조원대 자산 규모에 1990년대 후반 500억~25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던 우량기업이었다. 대규모 감원을 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헐값 인수와 대규모 감원에 이어 두산은 한국중공업의 여유자금으로 계열사를 인수하거나 출자를 거듭했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두산중공업의 자회사인 두산메카텍은 2001년 12월 ㈜두산의 기계사업부 영업권을 1600억원에 건네받았다. 이마저도 순자산 1387억원보다 과도하게 평가된 금액이었다. 이 와중에 두산은 2002년 4월 ‘신노사문화정책 방안’을 수립해 노조 옥죄기에 나섰다. 손배 가압류는 노조 탄압의 강력한 무기였다.

-당시 손배 가압류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강웅표 “두산이 악랄하게 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조합 간부들이 아닌 배달호 형님 같은 대의원과 일반 조합원들에게까지 임금과 부동산 가압류를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조합 간부들은 1996년 대표적 노동악법인 ‘일방중재(정부가 중재하는 동안엔 노조가 쟁의를 할 수 없다는 노동쟁의조정법 제30조 조항으로 1996년 12월31일 폐지됨) 철폐’ 투쟁을 하던 당시 부동산 가압류를 당해 본 경험이 있다. 그 이후 웬만해서는 집을 사지 않고 세 들어 산다. 당시 달호 형은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작은 집마저 가압류당했다. 가족들이 받은 충격이 컸을 것이다.”

-주검을 둘러싼 공방도 있었다고 들었다.
김창근 “회사는 빚이 많아서 비관 자살을 했다거나 타살, 유서 조작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현장 부검으로 타살 의혹이 해소되자, 회사 쪽은 부인과 두 딸에게 ‘시신 퇴거 및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시신을 회사 밖으로 퇴거시키고, 유가족의 회사 출입을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하루에 3000만원의 강제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손배 가압류로 죽은 사람의 가족들에게 다시 돈으로 압박하는 내용이었다. 또 고인의 모친과 여동생을 회유해 ‘장례절차 방해’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결국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법정에 서는 잔인한 시간도 있었다.”
배달호씨의 장례식은 사망하고서 65일이 지난 2003년 3월14일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노조는 경영진의 사과, 손배 가압류 철폐,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했으나 회사 쪽은 장례 절차와 위로금 문제만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양쪽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으나 정부의 중재로 노사는 손배 가압류 취하, 사장 명의의 담화문 발표, 부당노동행위 금지, 해고자 복직 전향적 검토 등에 합의했다.
이효리씨 큰 역할, 단순 모금으로 끝나선 안 돼

-11년간 손배 가압류 문제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전대동 “손배 가압류만 그런가. 노동 분야 전반이 지난 11년간 나아진 게 거의 없다. 일단 언론이 문제다. 사람들이 노조 하면 ‘귀족’으로 받아들이고, 파업을 하면 ‘불법’이라 생각한다. 창조컨설팅이란 업체가 11개 업체의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2012년에 밝혀졌다. 그래도 노조는 파괴된 상태 그대로다. 노조를 적대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여전하다.”
-그래도 ‘노란봉투 캠페인’처럼 시민들이 손배 가압류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전대동 “이효리씨가 큰 역할 했다.(웃음) 우리도 일반 시민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노란봉투 캠페인은 모금으로 그쳐선 안 된다. 손배 가압류가 얼마나 부당한지 전 국민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돼야 한다.”

-지난 11년간 주로 무슨 활동을 했고,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김창근 “복직투쟁만 한 것은 아니다.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의 비리 수사를 촉구하는 1인시위, 손배 가압류로 고통받는 다른 사업장과의 연대투쟁 등을 해왔다. 노조에서 상근직을 맡기도 했다. 내가 금속노조위원장을 했었고, 김춘백 동지도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전대동 동지는 진보 진영의 정당 활동과 열사정신계승사업회 운영을 병행했다. 강웅표 동지는 현재 금속노조 경남지부의 복지부장을 맡고 있다. 노조 상근직을 맡거나 복직투쟁을 하면서 노조로부터 생계비를 지원받았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6444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