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가압류 14년, 애널리스트는 빚 60억 일용직 노동자가 됐다
[손배가압류 1세대의 오늘①] 박강우 전 장은증권 노조위원장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를 받은 적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돌아오는 돈은 없을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2003년 1월 9일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는 이렇게 쓰고 분신했다.
그의 급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회사가 노조와 간부들을 상대로 65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임금과 부동산을 가압류했기 때문이다. 배달호의 죽음은 손배가압류의 폭력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회는 두산의 ‘신종 노동탄압’에 분노했다. 두 달 뒤 회사는 손배가압류 소송을 철회했다.
연합뉴스는 2002년 7월 7일 ‘노조 상대 손배, 가압류 1천억 원대’이라는 기사에서 “민주노총 소속 조합을 상대로 걸려 있는 사용자 측의 손해배상 및 가압류 금액이 총 1천억 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12년이 흐른 지금, 그때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미디어오늘이 ‘손배가압류 1세대’를 만났다.
장은증권 노조위원장이었던 박강우(49)씨는 노동운동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해 손배가압류를 당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그는 현재 자신에게 걸린 손배소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2년 전에 50억대였으니 지금은 몇억 더 붙었으려니 짐작만 한다. 지연이자 20% 때문에 금액은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이야기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7월 6일 신문들은 일제히 한 증권사를 비판했다. ‘고객 돈 빼돌려 명퇴금 160억 챙기다니…장은증권 기가 막혀’(경향신문), ‘주주몰래 회사 윽박질러 직원끼리 쓱싹, 장은증권 명퇴금 ’돈잔치‘’(중앙일보). 회사가 망하기 직전, 노조가 명예퇴직금을 받은 뒤 업무 정지 신청을 냈다는 내용이었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도덕적 해이’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1999년 5월호에 따르면 당시 장은증권 사측은 회생을 위한 증자 조건으로 전사원이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노조활동 포기를 조건으로 명예퇴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회사는 투자를 하지 않고 되려 ‘영업중지 신청’으로 노조와 사원들의 뒤통수를 쳤다. 심지어 사장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노사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며 위원장을 고소했다.
▲ 장은증권 노조가 2001년 박강우 위원장에게 청구된 손배가압류를 비판하며 만든 웹자보
장은증권에서 11년간 근무한 노미애씨는 1999년 1월호에 “우리는 회사만은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주주의 요구에 따라 전 직원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노사합의에 따른 퇴직위로금 12개월 치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보고 우리 회사가 영업 정지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악몽은 시작됐다”고 썼다.
이런 정황에도 예금보험공단은 노조위원장을 ‘배임 공모’ 혐의로 기소했고 손배가압류로 옭아맸다. 회사에서도 뒤통수를 맞은 노조를 국가가 또 한 번 죽인 셈이다. 민주노동당 등의 주최로 열린 2003년 1월 24일 토론회는 장은증권 사태를 “경영권에 권한이 없는 노조 위원장에게 구조조정과정에서의 정당한 노사합의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진행은 빨랐다. 2000년 8월 예금보험공단은 박 전 위원장의 재산 3억 4000만원을 가압류했다. 3억 4000만원 가압류에는 부친, 숙부, 조모의 집과 선산 등이 포함됐다. ‘신원보증인 제도’ 때문이었다. 박 전 위원장은 “장은증권 입사 때에 아버지와 숙부님이 신원보증을 서 주셨는데 그분들 집, 예금통장, 보함, 선산 등이 모두 가압류됐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선산이 잡혀 버리니까 집안이 뒤집어졌죠. 아버지도 문중에서 힘든 위치가 되고요. 계속 가압류 상태로 있었는데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더라고요. 결국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부분(가압류)은 갚았습니다. 친척들이 배상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때문에 고생만 하셨죠”
그러나 가압류로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예금보험공단은 가압류에 이어 박 전 위원장에게 13억 3000만원의 손배소를 청구했다. 명퇴금 노사합의로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였다. 조합도 아닌 개인에게 이 정도 손배가압류 '폭탄'이 떨어진 사례는 당시로써는 찾기 어려웠다.
▲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잡고'(손잡고)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시민청 이벤트홀에서 출범식을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그는 “제가 첫 사례일 것 같습니다. 이후에 두산이나 한진 등으로 적극 확산된 걸로 알고 있어요”라며 “처음에 13억을 봤을 때 눈앞이 깜깜했죠. 억대라는 금액이 상상이 안 되는 금액이어서”라고 말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소송촉진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확정선고 이후에는 연2 0% 지연이자를 납부해야 한다. “2년 전쯤 독촉장을 확인했을 때는 60억 가까이 됐던 것 같아요. 그중에 이자가 40억 정도. 그걸 어떻게 갚습니까”
손배소 60억 원, ‘평범한’ 생활이 가능할리 없었다. “매년 제 명의의 재산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을 해서 압류가 들어오니까 정상적인 생활은 못 하죠. 직장도 못 구하고 금융거래도 못 하고. 지금 하는 일은 통장으로 돈을 받는 게 아니니까요. 휴대전화 같은 건 노동조합에서 활동할 때 같이 일하던 분이 만들어줘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금융 투자분석가(애널리스트)였던 그는 지금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다. 공사현장을 찾아다니다 보니 일정한 거주지도 없다.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독촉장을 확인했던 이유다. 그는 “이쪽 일이 비 오거나, 자재가 안 들어오면 일을 못 하니까 급여가 그렇게 좋진 않아요. 보통 일당 8만원, 좋은 사람 만나면 일당 10만. 그래도 혼자는 먹고살아요”라고 말했다.
손배가압류 14년, 손배가압류는 그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놨다. 그는 지금도 그 단어만 봐도 분통이 터진다. “가끔 그런 기사가 뜨잖아요. 차마 다 읽지를 못해요. 차라리 형사 처벌은 감옥에 몇 년 갔다 오면 끝이라도 나는데, 손배가압류는 한번 확정이 되면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또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고통이 확산되니까 문제죠”
그러면서도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노조 위원장이었던 자신에게만 손배가압류가 걸렸다는 이유였다. “다른 기업은 조합원들에게까지 가압류를 걸었는데, 노조가 버텨내기 힘들죠. 회유까지 들어오면 노조는 깨집니다. 2003년에 배달호 열사가 죽지 않았으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세상은 몰랐을 거예요. 이게 계속 지속되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너무 불공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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