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23 시사인] “왕뚜껑이 나온 날, 뚜껑이 열렸다” (손잡고 윤지선 활동가)

“왕뚜껑이 나온 날, 뚜껑이 열렸다”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

원문보기 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5126

 

손해배상·가압류(손배) 피해 노동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식판에 컵라면과 김치, 단무지가 올라간 사진이었다. 중식이라고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식판 사진은 계속 올라왔다. 어떤 날은 멀건 국수에 김치, 어떤 날은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우유, 어떤 날은 동그랑땡 하나와 김치. 한 노동자는 “왕뚜껑이 나온 날, 말 그대로 뚜껑이 열렸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된 식판 사진은 경북 구미에 위치한 반도체 공장 KEC 직원들의 중식을 찍은 것이다. 평균 식대 단가가 1700원이라는 게 알려지자, 분노 여론이 형성됐다. <경향신문>이 보도했고 포털에서는 해당 기사에 20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이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 “사람대우 좀 해줘라 일하는 기계 말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고 노동자에게 저따위로 주냐”였다. 다른 댓글도 다수가 노동자에게 우호적이었다. 민주노총이 언급된 기사마다 악플 일색인 데 비하면 이례적이다. 그야말로 누가 보아도 사람대우에 대한 선을 회사 측이 넘었기 때문이리라.

 

ⓒ윤현지

사람대접을 하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기자회견을 연다. 이런 쟁의행위로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면 손해를 보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노동자들에게 사람대접을 하면 된다. 이것이 왜 일터에서만 유독 어려울까? 
KEC 측은 곧장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KEC 측의 반론이 7월2일자로 언론에 보도됐다. 반론 내용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순수 재료비가 관련 업종과 비교하여 낮지 않다.” 참고로 서울시 초등학교 급식 단가는 약 3000~3600원이다.

노동자들이 왜 분노하는지 모르는 회사 

KEC의 식대 단가를 보며 2015년 이슈가 된 부산의 한 막걸리 업체의 단가 ‘450원 식단’이 떠올랐다. ‘주말 근무 중식으로 제공된 고구마’는 노조 결성 기폭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밥을 계기로 참고 참았던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와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을 모아 폭로했다. 그 결과는 회사 측이 명예훼손 따위 이유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1억2000만원의 손배 소송으로 이어졌고, 노동조합은 200일이 넘는 고공 농성을 했다. 당시 회사 측은 ‘고구마를 제공한 것은 맞으나 간식이었다’ ‘주말 근무는 중식 제공 의무가 없다’는 주장 등을 펼쳤다. 하지만 회사는 손배 소송에서 패했다. 

KEC나 막걸리 업체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컵라면 급식, 고구마 급식이 학교나 병원같이 노동 현장이 아닌 곳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반박 주장보다는 사과가 먼저 이뤄지지 않았을까.

댓글에 언급된 사람대우는 많은 노동 사건의 원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쟁의행위를 하기까지 사연을 살펴보면 사람대우와 연결된다. 간식이나 장갑 등을 줄 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례 등 굴욕감이 자리 잡고 있다. 노동자들이 관리자의 일상적인 폭언과 폭력적 행위, 성폭력, 성차별 등을 폭로하면 회사 측은 ‘사장님이 정신적 피해를 당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에게 위자료 손배 소송을 걸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교섭을 하며, 단체행동을 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엄청난 이익을 바라는 것도, 회사와 일부러 힘겨루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대접을 받고 싶어서다. 소송이나 언론을 통해 확인하는 ‘사측 입장’에는 늘 자기반성이 없다. 노동자를 경제의 한 축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해주었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는 가정이 그리 어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