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30% “자살 충동”…손배 가압류는 ‘희망 압류’였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손해배상 가압류’ 피해 노동자 236명 첫 실태 조사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7월 3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쌍용차 해고자인 김주중씨 분향소에서 헌화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해고 기간 55개월. 국가가 제기한 손해배상액 14억7000만원. 퇴직금 가압류. 부동산 가압류.”
지난해 6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는 4년 전 한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해고도 해고지만 국가의 손해배상 청구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2009년 국가는 쌍용차 사태 당시 투입한 헬리콥터와 기중기가 손상됐다며 수리비 24억원을 청구했다.
김씨가 세상을 떠나고 3개월 만에 쌍용차 사태는 봉합됐지만 동료들에게 청구된 손배는 여전히 남았다. 2심은 손배액을 11억8000만원으로 인정했지만 9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갑절의 이자가 붙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김씨에게서 문자를 받았던 시민단체 ‘손잡고’의 윤지선 활동가는 특정 집단의 건강상태를 조사하는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팀(김승섭·박주영·최보경·김란영), 심리치유센터 ‘와락’과 함께 지난해 4월부터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쌍용차·유성기업 등 금속노조 소속 9개 사업장의 236명 노동자를 만나 심리·건강 상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24일 공개했다.
■ “희망이 없어 죽는다”
회사와 국가의 손배 소송은 당장의 생존권만 위협하는 게 아니다. 청구 금액이 워낙 천문학적이다보니 노동자의 희망을 저당 잡는다. 지난해 손잡고 조사에서 노동자 ㄱ씨는 “원래 손배 금액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자를 갚을 방법이 없다”면서 “100억원이면, 20억원씩 계속 (이자가) 붙는 걸 무슨 수로 갚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응답자 236명 중 10억~100억원 미만의 손배 소송이 들어왔다는 응답이 94명(40.3%)으로 가장 많았다. 200억원 이상이라는 응답도 56명, 100억~200억원 미만이라는 응답도 24명 있었다.
문제는 회사가 청구한 금액의 산정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처음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청구했다가 노조가 문제제기를 하면 깎아주는 식이다. 청구 금액이 부당해도 그 부당성을 입증하는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
■ “조끼 벗으면 제외해준다니까”
손배와 가압류는 노조를 와해하는 효과적 방식이다. 창조컨설팅의 자문을 받은 유성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취한 민형사상 소송만 1300건에 달한다. 평생 만져보지 못할 금액을 이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조합원 이탈로 이어진다.
응답자의 94.9%는 손배·가압류 이후 동료가 노조를 탈퇴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조합원 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는 응답도 64%에 달했다.
손배·가압류 이후 회사의 회유는 설득력을 얻는다. 노동자 ㄴ씨는 “정말 고민이 많았다. 조끼 벗으면 손배 명단에서 제외해준다니까”라고 말했다. 실태조사 참여자들에게 동료가 노조를 탈퇴한 이유를 복수응답으로 물었을 때 “관리자가 탈퇴를 권유해서”(52.0%)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동시에 차별과 협박이 진행된다. 조사 참여자의 절반 이상은 손배·가압류 소송 도중 ‘인사고과, 성과급에서 불리하게 평가받은 경험’(51.1%)이 있었고, ‘사직을 고민’(30.5%)하거나 ‘손배 금액을 들먹이는 회유·협박을 당한 적이 있다’(29.6%)고 했다.
■ ILO도 “손배 문제 해결해야”
손배 청구는 대개 파업 등 노조의 정당한 쟁의행위 이후 이뤄진다. 손배 청구를 받은 이유를 복수응답으로 물었을 때 응답자들은 “점거에 따른 업무방해”(74.2%), “파업 등에 따른 영업손실”(58.4%) 등을 꼽았다. 사실상 ‘괘씸죄’에 해당하는 “정신적 피해 보상”(18.5%)을 이유로 손배를 청구받은 경우도 있다.
헌법 33조 1항은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합법 파업’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정부가 앞장서 손배·가압류를 장려한 역사가 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 최병렬 당시 노동부 장관은 “노조 쪽의 불법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적극 활용하라”는 지침을 발표했다. 이후 ‘파업→업무방해 형사고발→손배·가압류 청구’는 하나의 공식이 됐다.
이는 국제기준과 거리가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7년 6월 이사회 보고서에서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라며 한국 정부에 파업 무력화 수단으로 악용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고했다. 같은 해 10월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손배·가압류에 대해 “쟁의행위 참가 노동자에 대한 보복조치”라며 “당사자국의 자제와 독립조사 실시”를 권고했다.
■ 악화된 건강
압박과 감시 속에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낸 조사 참여자들의 건강은 예상대로 나빴다. 손배·가압류 남성노동자 201명에게 건강 상태를 물었을 때 “건강이 나쁘다”는 응답은 34.8%에 달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일반 남성에 비해 12.4배나 높은 수치다. 노동자의 신체건강을 보여주는 대표적 병증인 근골격계 통증을 조사했을 때도 결과는 비슷하다. 손배·가압류 남성노동자는 일반 남성에 비해 허리 통증은 5.4배, 어깨·목 통증은 2.6배, 무릎·발목 통증은 3.3배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건강도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조사 참여 남성의 절반 이상(59.7%)이 “지난 1주간 우울증상을 느꼈다”고 답했다. 일반 남성의 11배에 달하는 수치다. 조사 대상 남성 62명(30.9%)과 여성 6명(18.8%)은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각각 일반 남성·여성에 비해 19.6배, 14.3배 높은 응답률이다. 전체 응답자 중 6명은 지난 1년간 실제 자살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 “가족들은 손해배상 몰라요”
김승섭 교수는 참여 노동자들의 심각한 우울증상에 대해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은 회사에서는 감시와 회유, 협박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가족이 (손배·가압류 사실을) 알까봐 전전긍긍하며 우편함 앞을 지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사 참여자에게 손배·가압류 노동자에 대한 주변의 인식을 복수응답으로 물었을 때, 응답자의 80.3%는 “손배·가압류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손배·가압류를 당한 것이 남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65.7%), “손배·가압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45.9%)는 응답도 많았다.
한 설문조사 참여자는 “아직 가족들은 손해배상에 대해 모르고 있다. 가족들에게 숨기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 갚을 수도 없는 돈에 옥죄이고 있는 셈이다. 연구를 진행한 박주영 박사는 “이분들 정신건강을 어떻게 빠르게 치유할까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손배·가압류로 악화되는 문제를 어떻게 예방할지에 초점을 뒀으면 한다”며 “어떻게 하면 가압류 자체를 조금 더 제한시키고 어떻게 하면 문제점을 없앨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