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길 없는 돈, 죽음 택하려 했다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 남성 피해자의 30.9%, 여성 피해자의 18.8%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는 일반 남성보다 19.6배, 일반 여성보다 14.3배 높은 수치이다.
장일호·김동인 기자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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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뜯어봐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숫자들이 있다. 어느 정도 짐작했으면서도 놀라게 된다.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손해배상(손배)·가압류 소송 피해 노동자 남성의 30.9%가 ‘있다’고 답했다. 비교를 위해 뽑아본 제6기 국민건강영양조사 데이터에서 같은 연령대와 업종의 남성 인구는 1.3%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일반 남성에 비해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남성이 지난 1년간 자살 생각을 한 경험이 19.6배 높다는 의미다.
통계적으로 우울 증상이나 자살 생각을 경험하는 비율은 여성이 더 높게 나타난다. 여성 데이터를 따로 뽑아 살펴봤다.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여성의 18.8%가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역시 일반 여성 인구 1.4%에 비해 14.3배 높은 결과다.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한 김승섭 연구팀(고려대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의 박주영 박사는 그 숫자들 앞에서 아연했다.
질병 원인을 찾는 역학의 세부 전공인 사회역학은 차별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해치는지 데이터로 탐구한다. 연구 대상자의 데이터가 일반 인구와 비교했을 때 두 배 정도만 높아도 충분히 높은 수치로 본다. 그런데 데이터가 이렇게까지 ‘튀면’ 연구자 스스로도 신뢰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 숫자가 맞나 의심하며 몇 번이고 데이터를 다시 돌렸다. 숫자는 일관성 있게 반복됐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피해 노동자의 비교군인 일반 남성과 여성 인구의 응답률도 한국이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걸 감안해서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은 그에 비해서도 남녀 각각 19.6배, 14.3배가 높은 거예요. 연구를 준비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압박감이 정신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굉장히 심각한 결과예요.”
1월24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박주영 박사가 9개 사업장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236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노란봉투법’ 20대 국회에선 논의조차 안 돼
1월24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갚을 수 없는 돈, 돌아오지 않는 동료’라는 제목으로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김승섭 연구팀(박주영·최보경·김란영)이 실시한 이번 연구는 9개 사업장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236명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의 신체 및 정신 건강과 경제적 상황 전반을 살피고, 일반 노동자의 직장 내 경험과 비교해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의 상황은 어떻게 다른지, 이 경험이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국내 최초로 연구했다(66~67쪽 인포그래픽 참조).
연구팀은 2018년 4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를 마무리하던 중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의 건강에 대해선 단 한 차례도 실태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심리치유센터 와락,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손잡고’ 공동협력 사업으로 실시된 이번 연구는 2018년 5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약 9개월간 진행됐다(<시사IN> 제567호 ‘억 소리에 묻힌 노동권을 찾아서’ 기사 참조).
2014년 <시사IN>과 아름다운재단·손잡고는 ‘노란봉투 캠페인’을 통해 4만7547명이 14억6874만1745원을 모아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를 지원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손배·가압류라는 ‘오래된 나쁜 짓’이 공론화됐고 관련법 개정 움직임도 활발했다. 하지만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들이 함께 만든 ‘노란봉투법’은 19대 국회 때 법안심사소위에서 단 한 차례 논의됐을 뿐이다. 20대 국회에서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졌다. 지난해 6월27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가 숨진 후, 손배·가압류를 ‘괴롭히기 소송’으로 규정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특례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의 통과도 불투명하다.
손배·가압류(피해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한 김란영·최보경 연구원, 김승섭 교수, 박주영 박사(왼쪽부터)
연구 책임을 맡은 김승섭 교수는 이번 연구를 손배·가압류 그 자체에 대한 연구라기보다 손배·가압류라는 ‘창’을 통해 본 한국 노동 현실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했다. “‘파업해서 회사에 피해를 주었으면 물어내야지’라는 깔끔하고 우아한 합리성이 한편에 있죠. 그런데 이번 연구를 통해 손배·가압류의 메커니즘을 살펴본 결과 손배·가압류와 노동 3권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결과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이 실제 현장에서 지켜지고 있는가라는 ‘근본’에 대한 절박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이번 연구 결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성을 띤다. 우선 국제노동기구(ILO)나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 등이 노동권 침해와 관련해 확인하고 싶어 하는 ‘수치화된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국제사회는 한국 정부에 손배·가압류와 관련한 실태조사를 꾸준히 요구해왔다. 이번 연구는 정부 차원의 조사는 아니지만 손배·가압류가 어떻게 노조 활동을 악화시키고 조합원 수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처음으로 데이터화했다. 또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문항을 포함하여 손배·가압류를 경험한 노동자가 겪는 건강 문제를 드러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236명 가운데 무응답 등을 제외한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233명 중 남성은 201명(86.3%), 여성은 32명(13.7%)이었다. 금속노조 사업장 특성상 남성 노동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40~49세 노동자가 가장 많았고(159명, 68.3%) 결혼 상태 여부는 기혼이 다수였다(179명, 76.8%). 자녀 수는 2명 이상이 많았다(147명, 63.8%). 피해 노동자는 각각 9개 사업장에 소속되어 있는데, 쌍용자동차와 유성기업 등 몇 개 사업장을 제외한 소규모 사업장은 소속 회사명이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다. 박주영 박사는 “연구자로서는 이참에 이슈화해야 하지 않나 의아했는데, 피해 노동자들은 자신이 설문에 참여한 게 밝혀지면 또다시 손배·가압류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라고 말했다.
청구 금액 100억원 이상이 34%
손배·가압류 청구 소송을 제기한 주체는 회사가 97.9%(228명)로 압도적이었고, 회사와 경찰 등 국가기관 양쪽 모두에서 소송을 당한 사람도 28.3%(66명)를 차지했다. 손배·가압류 소송에 시달리는 노동자 약 75%는 10억원 이상의 금액이 청구됐으며, 100억원 이상도 약 34%였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노동자 3명 중 1명이 100억원 이상의 손배·가압류 청구를 받은 셈이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된 후 가압류 방식은 채권(임금·전세보증금) 압류가 55.8%로 가장 높았으며 부동산 압류가 9.9%,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 동산을 압류당한 경험도 1.3%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손배·가압류 청구 소송 중 일터에서 구체적으로 노동권이 어떻게 침해당했는지도 물었다. 가장 많이 경험한 내용은 ‘인사고과, 성과급 등에서 불리하게 평가받았다’(51.1%)였으며, 사용자 측의 회유나 협박을 경험한 비율도 29.6%, 관리자에게 감시를 당한 경험은 24%에 달했다. 이로 인해 사직을 고민한 노동자가 30.5%였으며, 노조 사무실 출입이 꺼려지고(19.7%), 노조 탈퇴를 고민(15.9%)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험을 반영하듯, 손배·가압류가 제기된 이후 동료가 노조를 탈퇴한 적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94.9%가 ‘그렇다’고 답했다. 연구팀이 가장 중요하게 묻고 싶었던 질문도 이 결과와 연결된다. 손배·가압류 이후 노조 조합원이 얼마나 감소했느냐는 질문에 64%가 ‘조합원 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고 답했다. 손배·가압류가 실제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제약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결과다.
흔히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등한 관계로 상상하지만, 그렇다면 노동권이 헌법에 기본권으로 별도 보장될 이유가 없다. 노동 3권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가깝다. 손배·가압류는 이 안전장치를 걷어내는 ‘큰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주영 박사는 정리해고 문제와 손배·가압류 문제가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일개 사업장의 비극적 사건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은 2014년 KT에서 8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해고됐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학습효과를 나타낸 거죠. 손배·가압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측이 손배·가압류를 지금처럼 별다른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상 모든 사업장에서 노동 3권을 제약할 카드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건강 문제 중에서도 특히 정신 건강과 관련한 답변이다. 연구팀은 우울증 척도검사지(CES-D11)를 활용해 ‘지난 일주일간 우울 증상을 경험했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남성의 절반이 넘는 59.7%(120명)가 우울 증상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나이대,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일반 남성 인구에 비해 11배나 높은 결과였다.
그보다 연구팀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과 ‘지난 1년간 자살을 시도한 경험’에 대한 결과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반 남성에 비해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남성이 지난 1년간 자살 생각을 한 경험은 19.6배 높았고, 자살을 시도한 경험은 43배나 높았다. 최보경 연구원은 설문지를 코딩하면서 입력했던 주관식 답변을 떠올렸다. 설문지의 마지막 질문은 ‘손배·가압류 청구 소송이 제기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입니까’였다.
손배·가압류와 노동 3권은 공존 불가능
“대부분이 ‘아내와 아이들이 소송 사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렵다’ ‘법원에서 어떤 게 올지 몰라서 우체통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같은 답을 가장 많이 적어주셨거든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40대나 50대 남성 가장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감을 생각하면, 억대의 손배·가압류 소송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나누지 못하고 혼자 몸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에 노조 활동을 이유로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회유, 협박, 감시당하는 상황이라는 점도 감안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