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3권 제약하는 손해배상·가압류 소송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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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 김승섭 연구팀(박주영·최보경·김란영)은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 설문지 답안을 코딩하면서 여러 차례 놀랐다. 먼저 A4 용지 25쪽에 걸쳐 100여 개가 넘는 까다로운 질문에 답변 ‘누락’이 거의 없었다. 또 보통 설문지 마지막에 있는 주관식 답변은 대부분의 응답자가 건너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응답자 236명 중 절반 가까이가 긴 답변을 보내왔다. 당사자의 충실한 답변은 연구 결과를 한층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이 가능했던 것은 윤지선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활동가가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와 지난 4년간 부대껴온 세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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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대상자 9개 사업장 236명을 모두 직접 만났다.
3~4개월 걸린 것 같다. 지역도 워낙 다양했고 어떤 공장은 3교대 출퇴근 시간을 맞추느라 오전 7시, 오전 11시30분, 오후 3시, 오후 7시… 이런 식으로 다 따로 약속을 잡아야 했다. 손배·가압류 소송을 겪으며 노조가 많이 깨져서 복수 노조인 데도 워낙 많고, 현재 노조원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이들과도 연락해 섭외했다. 야간근무를 한 사람의 피로도를 고려하면 질문이 많고 불친절하기도 했다(웃음). 참여한 이들이 “이게 무슨 효과가 있겠어”라면서도 열심히 작성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더라. 특히 이번 설문에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규모가 작은 사업장이 다수 포함된 점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손배·가압류 대상 사업장 수가 적다 보니 여러 노동문제 중에서도 ‘일부 사례’에 해당하는 이슈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일부 사례라고 해서 해당 기업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년 넘게 지속적으로 손배 청구 소송이 남발되다 보니 이제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없어도 된다. 노조가 아예 파업할 엄두를 못 낸다. 지난해 파업으로 인해 손배·가압류를 당한 사업장이 한 곳밖에 없다. 최근에는 기자회견이나 피켓 하나 드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런 작은 쟁의행위에도 다 손배·가압류를 건다. 일부가 경험한 일의 학습효과가 전체 사업장으로 퍼져서 노동 3권을 제약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살을 결심하고, 심지어 시도한다. 누군가 죽어야만 이 문제를 ‘겨우’ 돌아보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에 대한 최초의 실태조사다.
손배·가압류 사건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법과 노동자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손잡고’ 활동을 하면서 지난 4년간 법·제도 개선에 앞서 제대로 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정부와 국회에 여러 차례 요구해왔다. 손배·가압류 금액 규모 같은 단순 현황 파악은 ‘손잡고’가 매년 계속 해왔다. 하지만 실제 피해 노동자 개개인이 어떤 노동권 침해를 경험했는지, 또 이러한 권리침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은 절실했지만, 우리 역량 밖의 일이었다. 김승섭 연구팀은 손배·가압류 관련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해준 최초의 전문가였다.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나 국제노동기구(ILO)는 피해자의 증언이 담긴 영상이나 사진이 아닌 수치화된 자료를 요구한다. 그 자료가 마련된 셈이다.
연구 결과는 어떻게 활용되나?
민주노총 금속노조 국제국과 논의 중이다. 국제통합제조산별노련 등에 관련 내용을 공유하거나, ILO 제소 등도 고려해볼 수 있다. 양대 노총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폭넓게 논의하려 한다. 2~3월 중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도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