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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쟁의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기업이 민주노총 20개 사업장에 1천52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업이 손해배상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노조 탈퇴·해산, 해고자복직 포기를 종용하는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기업이 노동 3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손해배상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저임금 노동자 88명에게 301억원 청구
"직장폐쇄 종료 뒤 복귀했더니 관리자가 따로 불러 희망퇴직을 하지 않으면 301억원의 손해배상 금액을 갚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회사 다니면서 이 돈 갚을게요'라고 말하고 나왔습니다. 저 혼자 한 달에 130만원을 버는 데 어떻게 갚나요."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손을잡고'(손잡고)가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개최한 손배가압류 피해사례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가한 김순희씨 얘기다. 경북 구미에 위치한 반도체 제조업체 KEC에서 일하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다 끝내 흐느꼈다.
금속노조 KEC지회는 2010년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 적용을 두고 회사와 임금·단체교섭을 벌이다 같은해 6월21일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같은달 23일 파업 중인 조합원에 대해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지회는 같은해 10월21일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1년여의 직장폐쇄가 끝나고 2011년 6월 공장으로 돌아간 지회 조합원들을 기다린 것은 회사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김씨 등 조합원 88명이 301억원을 물어내라는 것이다. 김씨와 같은 회사를 다녔던 남편은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됐다. 김씨는 최저임금 수준인 월 130여만원을 받고 있다.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우리 아저씨들에게 그런 일은 안 생기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며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식도 키우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이를 낳고 키울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사업장에 손배 소송 집중
손잡고가 집계한 결과 올해 8월 기준으로 기업이 노조와 노동자들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57건이다. 민주노총 사업장 20곳에서 해당 노조에 제기한 손배 청구액만 1천521억9천여만원에 이른다. 손잡고의 2014년 3월 조사에서는 17개 사업장 1천691억6천만원이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사내하청비정규직지회에 제기된 손배액이 326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철도노조(243억원)·쌍용자동차지부(174억원)·언론노조 MBC본부(195억원)·한진중공업지회(158억원)도 적지 않은 금액의 손배 소송을 당했다.
간담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손해배상 목적이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고 조합원 간 갈등을 유발하는 데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노사합의로 회사가 제기한 손배를 철회했지만 경찰이 제기한 손배 소송은 1심 재판부에서 인정돼 11억원을 물어야 할 처지"라며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싸웠던 노동자들을 정부가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성민 금속노조 유성기업영동지회장은 "소송을 당한 당사자 대부분이 해고자들인데 이들에게 막대한 액수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살지 말라는 사형선고와도 같다"고 말했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363일간 고공농성을 벌인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정명·한규협씨는 "재판부가 고공농성을 한 전광판 운영업체에 5억4천만원을 물어 주라고 판결했다"며 "최근 두 가정 세간살이에 대한 압류·경매가 진행돼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기업 소송 남용 금지 담은 노조법 개정 움직임
손잡고는 국회에 쟁의행위를 이유로 한 기업의 노조·노동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막을 수 있는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기로 했다. 양대 노총과 손잡고·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장·부동산·임금뿐 아니라 전월세 임대차 보증금까지 가압류하는 등 기업의 손해배상 전략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며 "노조·노동자를 상대로 소송 남용을 금지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원식 의원은 "노동자의 노동 3권 행사에 대해 기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법원이 이를 인정하는 사태를 놓아두고는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지 못한다"며 "노동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손배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쌍용차·유성기업·KEC·동양시멘트·기아차 사내하청·철도노조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원문보기 :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9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