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6 한겨레] “법원에서 그랬습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법원에서 그랬습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박기용 기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63428.html

단식농성으로 추석연휴 보낸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단식 닷새째 “고용부, 현대기아차 직접고용 명령해야”
“‘불법파견’ 방치 14년간 해고자 196명에 36명 구속”
‘특별채용’ 법원 판결에 어긋나…“끝까지 싸우겠다”

26일 오전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단식농성 중인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기아차의 불법파견 처벌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노동부는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처벌하라”, “재벌의 편에 설 것인가 불법파견 처벌하라”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26일 오전.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지방고용노동청 4층 한쪽 구석을 차지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남은 명의 기자들 앞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은박매트 깔린 사무실 바닥에 60여명의 조합원들이 앉았고, 단식 중인 지회 대표단 십여명은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해결하라’, ‘정몽구 정의선 구속하라’고 쓴 펼침막 한 가운데 자리 잡았다. 하얀색 생활한복에 감색 조끼를 걸친 차림이었다. 40대로 보이는 남성들이 가장 많았고, 3분의 1가량은 여성이었다.

 

이날은 이들이 노동청을 점거한 지 7일째, 집단단식 5일째다. 실내 곳곳에 빈 생수병이 놓였고 사무실 벽과 수납장 위엔 빨아놓은 듯한 수건과 검은 양말, 회색 티 등이 널려 있었다. 민주노총 경제본부와 민중당, 인근에 위치한 향린교회 명의의 ‘지지 벽보’들이 벽에 붙었다. 명절 연휴를 꼬박 이곳에서 굶고 지낸 이들은 지쳐보였다. 사무실 반대편엔 휴일인데도 출근한 노동청 직원 대여섯명이 기자회견 중인 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기아차에서 10년이 넘게 비정규직으로 일했다는 한 여성 조합원(최정은·38)이 마이크를 잡았다. 하얀 옷에 조끼를 걸쳤다.

 

“전 오늘 아이들을 데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전 가장입니다. 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 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아이들은 제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왜 아이들까지 끌고 오냐’, ‘애초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것 아니냐’는 이들도 있지만, 법원에서 그랬습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그게 맞다’고. 단지 그거 해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이곳을 점거한 우리가 범죄자가 아니라, 이 상황을 만든 정몽구·정의선이야말로 불법파견 범죄자입니다. 며칠이 됐든 아이들과 여기서 버틸 겁니다.”

 

현대차 아산공장의 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이라 밝힌 지현민(44)씨는 “10년째 해고자 신세”라며 말을 열었다. “정부가 14년 간 (현대·기아차의) 불법파견을 방치한 세월 동안 해고자들이 무려 196명입니다. 구속된 이는 36명이고 이들이 받은 징역을 합하면 18년이 넘습니다. 손배가압류도 4천억원에 이릅니다. 조합원들 가정은 파탄이 났습니다. 현대·기아차나 고용노동부가 단 한 번이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런 피해는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우린 용서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이들이 늘수록 현대·기아차와 고용노동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특히 스스로 불법파견으로 판정해놓고도 14년이나 상황을 방치한 고용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고용부는 2004년 현대차 사내하청 9200여개 공정을 불법파견이라 판정했고, 2007년부터는 법원도 여러 차례 현대·기아차의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 판결해왔다. 고용부 장관 자문기구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지난달 ‘법원 판결 기준에 따라’ 현대·기아차에 직접고용을 명령할 것을 고용부에 권고했지만 아직 별다른 조처가 없다. 지난 19일 기아차 사쪽과 정규직 노조가 특별채용을 통해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1300명을 내년까지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하기로 했고 현대차도 올해부터 2021년까지 사내하도급 노동자 3500명을 특별채용한다고 밝혔지만, 당사자인 이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 ‘특별채용’은 그동안의 근속이나 체불임금이 인정되지 않는데다 법원 판결 취지에도 어긋난다. 지난해 2월 서울고법은 이들의 사내하청 입사시점(또는 입사 2년 뒤)부터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하고 임금 차액까지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들은 기자회견 말미에 낭독한 입장서를 통해 14년 간 불법파견을 저지른 현대·기아차에 대한 처벌과 고용노동부의 현대·기아차에 대한 직접고용 명령, 당사자와 원청의 직접교섭 성사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앞줄로 나와 입장서를 읽던 한 대표자는 “농성 4일차에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부모님 같은 누나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에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는 대목에서 잠시 그대로 멈춰 울먹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동생 그토록 바라던 정규직 명찰을 보고나서 눈 감고 싶다고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25명의 비정규직 대표자들은 민족의 명절에 곡기마저 끊어야 했습니다.”

 

정규직을 써야 할 자리에 불법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하면 범죄다. 파견법 위반이면 징역 3년, 근로기준법의 중간착취 위반이면 징역 5년이지만 14년째 위법 중인 현대·기아차에 대해선 지금까지 아무런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다. 김수억 기아차비정규직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재벌 그룹의 불법파견만 해결해도 40만개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며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약속했지만, 행정개혁위의 권고가 나오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현대·기아차의 사내 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법원도 인정한만큼 고용부가 직접고용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