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4 한겨레]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 “괜찮다고 말하면서 죽어간다”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 “괜찮다고 말하면서 죽어간다”

 

정환봉 오연서 기자 bong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79760.html#csidxafefb11ba07f0508b9dbb75db420637 

 

236명의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만난 ‘손잡고’ 윤지선 활동가
“정부가 노동자 실태조사 나서고 기업 손배·가압류 막아야” 

손배·가압류 노동자 200여명을 만나 건강 실태 등을 조사한 ‘손잡고’의 윤지선 활동가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손배·가압류 노동자 200여명을 만나 건강 실태 등을 조사한 ‘손잡고’의 윤지선 활동가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손잡고’(손배가압류를잡자!손에손을잡고) 활동가 윤지선씨는 노동자들에게 씌워진 손배·가압류라는 굴레를 ‘유령’이라고 불렀다. 현실적이지 않은 큰돈이지만 그 돈이 주는 공포는 생생한 현실이다.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들은 쉽게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사상 첫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 조사를 위해서 윤씨는 이들을 하나하나 설득해야 했다. “한 분은 설문조사를 2번이나 거절했어요. 그러다 겨우 만났죠. 택배 일을 하시더라고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대요. 그런데 그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손배 당한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까….”

 

많은 손배·가압류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망각을 선택한다. 윤씨는 손배·가압류를 당해도 “괜찮아”, “살만해”라고 습관처럼 말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힘든 거 아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라고 물었더니 “잊지 않으면 못 사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공포가 낳은 망각이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실태조사에 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여러 회사가 소송에서 이긴 뒤에도 손배를 집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맞는 것보다 언제든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손배·가압류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요구했어요. 재벌 등 기업 쪽에서는 손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는 일부일 뿐이고, 손배를 집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냐고 이야기하니까요. 하지만 일부가 아니고요. 집행하지 않는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숫자가 필요했어요.”

 

실태조사는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연구팀이 맡았다. “저도 손배·가압류 노동자의 상황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만나본 전문가 중에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김승섭 교수였어요.” 윤씨는 김승섭 교수팀과 수차례 질문을 만드는 회의를 했고, 전국을 돌며 설문을 받았다. 오랫동안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윤씨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노동자들도 실태조사에 응했다. 그렇게 만난 노동자가 236명이다.

 

이들 중에는 혼자 수십억원의 손배금을 떠안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가 손배에서 빼줄 테니 ‘노조를 탈퇴해라’, ‘회사를 나가라’,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취하하라’ 등의 회유를 해요. 누가 안 흔들리겠어요? 통장도 집도 압류하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혼자 남으면 수십억원을 떠안는 거죠.”

 

윤씨가 실태조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억울함’이었다. “손배·가압류 노동자들을 만나면 절절한 억울함을 느껴져요. ‘파업을 한 것이 나와 내 가족까지 죽도록 고통받아야 할 죽을죄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다. 하지만 회사가 고소·고발을 하고 손배 청구를 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파업이 합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변호사를 사고, 노무팀을 동원해 파업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반면 노동자들은 변호사 구할 돈도, 수사기관과 법원을 찾아다닐 시간도 부족하다. 창조컨설팅과 같은 노무법인의 자문을 받아 파업을 유도한 뒤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를 걸어 노조를 없애는 전략을 짠 사실이 들통난 회사가 여럿이지만, 기업을 상대로 한 수사는 늘 지지부진하거나 한없이 늦춰진다.

 

윤씨는 악순환이 앞으로도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수백명을 만났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저희도 한 일인데, 정부는 더 잘할 수 있잖아요. 정부가 손배·가압류 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해 실태조사하고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막는 방안을 내놓았으면 좋겠어요.”

 

정환봉 오연서 기자 bonge@hani.co.kr